소셜미디어 시대이자 평판의 시대, 추문이나 루머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개인이나 기업은 없다. ‘유리턱’의 저자 에릭 데젠홀은 위기 관리의 지혜를 얻기 위한 책으로 ‘노인과 바다’를 추천한다.

온라인 디지털 시대. 그물망처럼 뻗친 소셜미디어를 타고 정보와 뉴스는 빛의 속도로 생겨나고 퍼져간다. 그 속에는 진실과 거짓, 사실과 추측이 혼재한다. 미담도 추문도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스캔들일수록 더 빠르고 파상적이다.

얼마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 그랬고, 최근 유명 소설가의 표절 파문이 그랬다. 둘 다 사건 하나로 당사자들은 단번에 치명상을 입었다. 사태가 개인 수준에서 자신이 속한 혹은 관련된 기업으로 번져간 것도 닮았다. 두 경우는 모두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고, 본인도 ‘사과’했다. 하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브랜드 시대, 평판 관리는 누구에게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개인, 기업, 기관 어느 하나 그 걱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번역돼 나온 ‘유리턱(Glass Jaw)’은 그 점에서 시의성이 있다.

저자 에릭 데젠홀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백악관 공보실을 시작으로, 위기관리 전문회사를 창업해 숱한 기업 및 기관에 자문을 맡아온 전문가다.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답으로 보내온 조언들이 마키아벨리를 방불케 한다. 그만큼 냉정하다.

-제목을 ‘유리턱(glass jaw)’이라고 붙였다.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어떤 유형의 권투 선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강해 보이지만, 의외로 ‘한 방’에 그냥 쓰러뜨리기 쉬운 선수를 말한다. 제목으로 쓴 이유는 현대 사회의 아주 강력한 사람이나 기관, 조직이 지금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는 오히려 특별히 취약해진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런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위기 관리 업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기업이나 저명 인사, 기관들이 아직 세상을 1980년대처럼 오판하고 있다. 과거에 써먹었던 위기 관리의 노하우가 아직도 통할 수 있을 거라는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변화를 말하나?

세 가지 주요 요인이 미디어 환경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첫째, 정보가 전파되는 속도다. 둘째, 정보의 양이다. 특히 부정적인 정보는 엄청나게 요란하게 퍼져나가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만다.

셋째, 독성이다. 인터넷 공간은 부정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취약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공격 목표물이 된 상대는 반격해 싸울 시간이나 여지조차 없게 만든다.

-그 배경으로 ‘마이크로 유명세 사회(micro-celebrity society)’를 꼽았다. 무슨 말인가?

오늘날 모두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름의 ‘작은 유명인사’가 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청중(audience)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개인이나 기업, 기관의 평판 관리 측면에서는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종종 유명 인사나 기관, 기업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들을 내놓기 때문이다. 전파하는 사람들도 주목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있다.

-뉴스와 정보 확산에 관한 한 전통적인 ‘게이트 키퍼들’이 급속도로 힘을 잃으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옛날에는 어떤 의심스런 주장을 무마하려고 하면 기자나 정치인, 법원을 상대로 설득하거나 설명하면 됐다. 터무니없거나 부당한 주장은 전파되기도 전에 검증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말을 전파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갖게 됐다.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진위가 의심스럽거나 정당하지 않은 주장도 마음껏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됐음을 뜻하기도 한다.

-구식 거대 세력(골리앗)과 게릴라 세력(다윗) 간의 힘이 역전되면서 지금은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했는데?

인터넷은 힘 있는 소수로부터 약한 다수로 힘의 이전을 가져왔다. 이제는 겉보기에 힘이 없는 사람이나 집단이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을 상대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미디어라는 중간 매개가 일종의 심판이나 중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없다. 직접적으로 격돌하고, 이 경우 순간 결집한 익명의 다수가 유리하다.

-종래의 위기 관리 방안이 소용 없어졌다는 얘긴가?

그보다는 위기 관리의 옛날식 철학이 쓸모없어졌다고 하는 게 나은 표현이다. 나는 요즘도 어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즉각 대응이 중요하다’는 말 같은 상투어를 듣는다. 하지만 때로는 무작정 즉각 대응했다가 부정적인 반응을 더 촉발하거나 자극하기도 한다.

무조건 사과하는 게 좋다는 상투적인 지침도 마찬가지다. 공개 사과의 경우 대부분 서툴게 진행되거나 오히려 사태를 망쳐놓는 경우가 많다. 섣부른 사과들은 종종 나중에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인정될 수도 있다.

사건 결과에 따라 잃을 게 많은 고객을 변호하는 사람이라면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해 상투적인 조언을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될 수 있다. 옛날식 대처 요령이 언제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기 관리의 실무 교본이나 수칙 같은 것이 이제는 통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얘기하고 싶다.

-상투적인 옛날식 위기 관리 방식으로는 어떤 게 있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평판에 대한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기사보다 앞서가라(get ahead of the story)’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한번 공격의 목표물이 되면 결코 쏟아져 내려오는 기사들을 앞설 수가 없다. 언제나 뒤를 좇아가게 돼있다.

더욱이 뉴스에 앞서서 선제적으로 대응한답시고 취하는 행동과 조치들이 시장이나 대중 사이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다 보면 위기 관리는 난장판이 된다. 사안에 따라 다른 전술로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는 말도 그런 상투적인 대응책 중 하나다. 이것은 어느 정도 조건이 충족됐을 때만 쓸 수 있는 마지막 해결책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작정 ‘죄’를 자백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소셜미디어가 가장 큰 화근이라고 했다.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위기 관리의 본질은 부정적인 사안이나 사태를 ‘봉쇄(contain)’하고 나쁜 뉴스를 사라지게 하는 일인 반면, 소셜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분산시키는(dispersive) 기술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황의 호전에 도움이 될 만한 특정 정보를 공유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는 있다. 상품 리콜 같은 것과 관련한 중요 정보를 전파할 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 사태가 전개되는 것을 모니터링하는 데도 유용하다. 또 저명 인사가 당신을 변호하는 의견을 내놓는 경우처럼 유리한 콘텐츠를 공유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주주들과 소통하려고 할 때는 유용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진정보다는 불길을 키우기 십상이다. 소셜미디어는 아주 선동적인 매개물이다.

-루머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봤는데?

모든 미디어가 똑같지는 않다. 어느 한 매체가 공격을 시작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따라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부당한 공격에 처했을 경우에는 한 다른 매체로 하여금 공방을 벌이게 하면 도움이 된다. 문제를 제기한 어느 한 매체가 무시하고 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정보가 있으면 다른 매체가 그것에 관심 가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대부분의 미디어가 단일한 공격 전선으로 뭉쳐져 있을 경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매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교적 덜 알려진 신생 매체들을 통해 기존 유력 매체들에 대한 감시견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당신은 스캔들에 대한 수습책으로 무조건적인 사과가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사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기독교적인 사과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죄와 용서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종류의 사과다. 여기서는 당사자의 진정한 회개가 목적이고 고통은 거기에 따르는 필연적인 대가다. 사과의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둘째, 업무적인 사과다. 가시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목적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진심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대중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의 사과다.

문제는 위기에 빠진 대부분의 개인과 기관은 자신의 사과가 이런 전략적 차원의 것이면서도 기독교적인 사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복귀’라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 기독교식 선의를 최대한 보여주려 한다.

셋째, 결혼생활식 사과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과해야 될 때가 있다. 자신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질 때조차 상황 호전을 위해 하는 사과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했다고 믿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는 경우다. 이 경우 잘 진행되면 처벌과 논란의 강도는 약해지고, 다시 평판을 쌓아갈 수도 있다.

사과에서 가장 큰 변수는 당신이 혐의를 받은 행동을 실제로 했는지 여부다. 두 번째 변수는 어떤 유형의 사과를 할 것인가이다.

과거 GM이 시동 스위치 결함으로 인한 대규모 리콜 사태에 직면했을 때 메리 바라 GM CEO가 의회에 불려나간 적이 있다. 사상자를 발생시킨 제품을 생산한 데 대한 사과를 요구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핵심적인 사과는 피해갔다.

그 이유 중 일부는 그런 사과를 했을 경우 미국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과한 것은 ‘소비자를 실망시킨 데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상자를 낳은 제품 제조에 대한’ 사과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결국에는 단기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어떤 말보다는 추후에 회사가 제품 개선을 위해 취한 조치들(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도요타도 리콜 위기 후에 판매가 70% 상승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요타는 사후에 충성스런 자사 고객에 초점을 맞췄고 핵심 고객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취한 행동들이 효과를 봤던 것이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인가?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맞는 말이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이 법이나 다른 의제들과 서로 관련이 될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많은 위기 상황에서는 진실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실제로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시인부터 하는 것은 어리석다.

자칫하면 위기 상황을 거치면서 어떤 당사자는 정보를 감추거나 속이는 방식으로 살아남게 되는 추한 현실만 남을 수 있다. 가령 애플 같은 회사들이 비밀주의로 악명높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그런 불투명성으로 인한 보상을 받아왔다. 그 배경에는 사람들이 애플 제품을 좋아하고, 이런 경우에는 그들에게 다른 룰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도 거짓말로 결국에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런 거짓말이 비도덕적인 것인가? 그렇다. 효과적이었나? 불행히도 때로는 그렇다.

-빌 클린턴을 위기 관리의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나?

핵심을 보자. 미국에서도 흔히 그가 사과를 했고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말이다. 모니카 르윈스키에 관한 추문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맨처음 그는 거짓말을 했다.(성관계를 부인했다)

두번째, 그는 묵묵부답했다. 이때 그는 다른 전략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셋째, 그는 ‘인신 파괴의 정치(the politics of personal destruction)’는 끝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휘하의 아주 공격적인 보좌관들을 불러 의회 내 적들(클린턴에게 공격적인 의원들)을 맡으라고 지시했다.

넷째, 그 적들은 조사를 받았고, 그들 역시 성적인 위선자들임(성적 추문에 연루됐거나 혐의가 있음)이 판명됐다. 이런 사실이 노출되면서 그의 적들이 제거됐을 때 클린턴은 사과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일처리였다. 하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

-한국에서도 크고 작은 스캔들이 일어난다. 얼마 전 재벌 총수 딸의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고, 최근에는 유명 소설가의 표절 사건이 있었다. 둘 다 외신에도 보도됐다. 두 경우 다 당사자가 사과했지만 너무 늦었고 미온적이어서 더 화를 키웠다고들 한다. 어떻게 했어야 할까?

진짜 위기와 위기 관리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진짜 잘못된 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위기 관리만 잘하면 당사자는 화를 면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위기에서 사과나 위기 관리는 ‘너무나 기대에 모자라고 너무나 뒤늦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상황 수습이나 사태 진정에 대한 조급증이 있다.

사과로 위기가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위기 관리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 요금에 불과하다. 대중은 당사자가 적절히 처벌받기 전까지는 복귀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땅콩 분노’ 사건에 연루된 여성은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고, 작가는 아마 글쓰기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땅콩 분노’ 여성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보다 작가가 글쓰기 본업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위기 관리에 있어서 예술, 문학, 역사에서 배울 게 많다고 했는데.

논란이나 스캔들 대처에 대해서도 경영학 수업보다 문학, 예술, 역사에서 배울 게 더 많다. 스캔들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요소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위대한 위기 관리의 고전으로 추천한다.

이 책에서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후에 상어와 만난다. 그는 자신이 잡은 대형 청새치를 싣고 아바나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결국에는 다 잃고 혼자서 돌아가게 된다.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그게 바로 위기 관리에서 배울 수 있는 위대한 교훈이다. 평판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생존을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위기 관리를 위한 실무적인 조언을 한다면?

몇 가지 유념할 원칙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주의와 피해망상을 혼동하지 말라. 피해망상은 비합리적인 걱정이고 주의는 당신의 약점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다.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취약하다. 혼자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절대 과민 반응하지 마라.

이메일을 써놓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번 더 확인하라. 오늘날 대부분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 특히 이메일의 ‘전체 회신’ 기능을 신중히 사용하라.

자기 자랑이나 과시가 남들에게는 어떻게 인식될지 신중히 생각해 보라.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실행 가능한 일에 집중하라. 그럴 때는 우군의 지원을 받아라. 당신에게 적대적인 편을 설득하는 데 매달리는 것은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이다.

물리치거나 반격보다는 인내에 집중하라. 비판자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단기적으로 보면 스캔들을 잘 헤쳐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극복해내는 사람이 많다. 생존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섣부른 희망보다는 인내하는 데 집중한다.

종결에 집착하지 마라. 만족할 만큼 완전 종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의 본연에 충실하라. 비난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강점에 집중해서 인정 받도록 하라.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정해진 ‘각본(playbook)’ 같은 것은 없다는 거다. 보편적인 룰이 있다고 믿지 마라.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간이다. 즉석에서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기대하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치거나 실망하게 된다.

◆ 에릭 데젠홀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뉴스 미디어와 정치학을 전공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백악관 공보실에서 일했다. 1987년 위기관리 회사 데젠홀 리소스를 창업해 CEO로 일했다. GE, 엑슨, 엔론, 프록터앤갬블 등 대기업과 기관 들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해오면서 유력지에 관련 글을 기고해왔다. 데젠홀 리소스는 현재 워싱턴DC, 새크라멘토, 로스앤젤레스, 런던, 브뤼셀 등지에 지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