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살아남은 음료업체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세계 최대 커피 업체인 네슬레는 2011년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세계 최대의 탄산음료와 주스 제조업체인 코카콜라도 2014년 러시아 공장 4개 중 2개를 닫았다. 펩시나 하이네켄, 다농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식음료 기업도 러시아 시장에서 최근 줄줄이 공장을 폐쇄하고 있다. 글로벌 식음료 업체들은 러시아 시장을 ’무덤’이라고 부른다.

롯데칠성음료가 러시아 현지에 마련한 밀키스·레쓰비 홍보 부스. 탄산음료‘밀키스’와 캔 커피‘레쓰비’는 각각 러시아 유성탄산음료와 러시아 캔커피시장에서 90%가 넘는 점유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런 러시아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국산 제품이 있다.  롯데칠성음료의 탄산음료 ‘밀키스’와 캔 커피 ‘레쓰비’다. 이들 제품은 각각 유성탄산음료와 캔커피시장에서 90%의 점유율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밀키스와 레쓰비를 실은 컨테이너가 부산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市)에 도착하면 항구 일대는 갓 내린 음료 상자를 옮기는 손길로 분주해진다. 그 다음 운송 수단은 횡단 열차와 자동차다. 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 등 러시아 주요 도시에 횡단 열차가 정차할 때 마다 음료 상자는 현지 도매상과 유통업자에게 전달된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총 이동 거리는 9300㎞에 달한다. 중국에서 비단을 싣고 유럽으로 이동하던 '육송(陸送) 실크로드'에 비할만한 대장정이다. 모스크바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 유럽과 맞닿은 러시아 서부 대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쯤이면 이동 거리는 1만㎞를 넘어선다. 육송 실크로드(약 6400㎞)보다 56% 더 먼 길을 지나온 셈이다.

밀키스는 탄산음료에 탈지분유를 배합해 만든 유성탄산음료다. 한국시장에선 콜라와 사이다에 밀려 인기가 덜하지만, 러시아에선 유달리 인기가 좋다. 밀키스는 러시아에서 2014년 한해동안 1320만달러(약 147억원) 어치가 팔렸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 누적 수출액은 8990만달러(약 1003억원)를 기록했다. 250㎖ 캔으로 환산하면 4억캔 분량이다.

레쓰비도 2010년 이후 러시아의 ‘국민 캔 커피’로 자리잡았다. 글로벌 리서치 기관 유로모니터 자료를 종합하면 롯데칠성음료는 2009년만해도 러시아 캔 커피 시장점유율이 26.2%로 네슬레(37%), 현지 업체 ‘자오(27%)’에 이어 3위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전세가 뒤바뀌었다. 롯데칠성음료는 경쟁업체가 경제 불안정·시장성 등을 이유로 주춤한 틈을 타 2010년 캔 커피 시장 점유율을 82%로 급격히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네슬레는 러시아 시장을 떠났고, 자오는 제품 출시를 중단했다.

밀키스와 레쓰비는 다양한 맛으로 러시아 주류(主流) 시장을 선도한다. 밀키스는 러시아 시장에서 총 11가지 맛이 팔린다. 파인애플·복숭아·오렌지·망고 등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맛이 수두룩하다. 레쓰비 역시 모카·초코라떼·에스프레소·아라비카·아메리카노 등 9종류가 유통된다.

성기승 롯데칠성음료 팀장은 "초기에는 제품군이 7개를 넘어서자 생산성이 떨어지고 판매 관리가 어렵다는 반대의견이 나오기도 했다"며 "하지만 러시아 바이어들이 '지역별로 선호하는 맛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 성공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열띤 반응을 이끌어 낸 식음료품은 밀키스와 레쓰비 뿐만은 아니다. 빙그레의 꽃게맛 스낵 '꽃게랑'은 2012년 이후 러시아 스낵시장에서 매년 12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현지 스낵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내륙 지역이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해산물 가격이 쇠고기 같은 육류보다 훨씬 비싸다. 이 때문에 해산물 맛이 나는 스낵이 드물다. 심재헌 빙그레 차장은 "감자 스낵이 주를 이루던 러시아 시장에 해산물 맛으로 차별화한 결과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며 "최근에는 러시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5000여개 점포를 보유한 유통 체인 '매그닛(Magnit)'에 입점했다"고 말했다.

빙그레는 꽃게랑을 내세워 우크라이나 등 다른 유라시아 국가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
기존 효자 상품의 위세도 여전하다. 팔도 '도시락' 사발면은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유라시아 국가와 유럽 14개 국가에 직수출된다. 팔도는 2014년 러시아에서만 9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오뚜기 마요네즈 역시 러시아 현지 마요네즈 시장에서 점유율 70%를 기록해 부동의 1위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 소비자들은 오뚜기 마요네즈를 육류와 과자·빵을 찍어 먹는 소스로 애용하거나, 라면에 넣어 먹는다.

오리온은 고래밥(현지명 '마린보이'), 초코송이(현지명 '초코보이')로 인기몰이 중이다. 초코송이는 초콜릿을 즐겨 먹는 러시아 문화와 잘 맞아떨어져 매년 3000만개가 넘게 팔린다.

유라시아 식품 시장에서 국내 제품 경쟁력이 증명되면서 일부 기업은 아예 유라시아 국가 현지에 제조 공장을 세우거나, 현지 기업을 사들였다. 롯데제과는 2010년 9월 모스크바 남서쪽 칼루가주(州)에 초코파이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연면적은 2만6991㎡ 규모다. 초코파이를 연간 300억원 어치 생산할 수 있는 크기다. 롯데제과는 2018년까지 이 공장을 2배 더 크게 증설할 계획이다.

롯데제과는 2013년 11월 카자흐스탄 제과시장 1위 업체 '라하트(Rakhat)'를 인수했다. 라하트는 카자흐스탄 초콜릿 시장 1위, 캔디 시장 2위, 비스킷 시장 6위의 대형 제과업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013년 12월 직접 카자흐스탄 총리를 만나 유라시아 현지 투자 확대 방안을 논의할 정도로 이 지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동해 연안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겸 군항(軍港)이다.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멈추는 종점이기도 하다. 도시 이름은 러시아어로'동방 정복'이라는 뜻이다. 러시아 정부는 자그마한 시골 도시였던 이 곳을 1856년부터 태평양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개발하기시작했다. 중국·러시아·북한 세 나라 국경이 만나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21세기 들어 국제 무역·관광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현재 인구는 60만명 수준이다. 러시아 정부는 2020년까지 이 지역에 2조루블(약 41조원)을 투입해 첨단산업 기지와 경제특구를 조성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