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헤지펀드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가 삼성정밀화학의 지분을 5% 이상 매입하면서 국내 기업을 노린 해외 투자자본의 공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헤르메스는 지난 3일 법무법인 넥서스를 통해 삼성정밀화학의 지분 5.021%(129만5364주)를 확보했다고 공시했다. 헤르메스는 영국 연기금인 브리티시텔레콤의 자회사로, 301억원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삼성물산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른 헤지펀드가 삼성그룹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자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헤르메스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넥서스는 “지분 매입 목적은 경영 참여가 아닌 투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과거 삼성물산의 지분을 사들인 후 시세차익을 낸 전력이 있어 이번에도 삼성그룹이 엘리엇의 공격으로 혼란한 틈을 타 차익을 노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약식 보고·삼성그룹 지배구조에 영향 없다"…단순투자에 힘 실려

헤르메스의 삼성정밀화학지분 취득 의도는 크게 2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엘리엇처럼 경영 참여를 통한 시세 차익을 노리고 있거나 단순 투자다. 현재까지는 단순 투자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헤르메스는 넥서스를 통해 올린 공시에서 약식 서식 보고를 사용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약식 서식은 지분취득 목적이 강영참여가 아닌 단순투자일 때 활용한다. 목적이 경영참여일 경우에는 보통 서식 보고를 통해 금감원에 보고한다는 게 금감원 측의 설명이다.

삼성정밀화학도 이번 지분 매입을 단순투자로 보고있다. 삼성정밀화학 관계자는 “헤르메스는 작년 말부터 이미 삼성정밀화학 지분 2.9%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년에 1~2회 정도 정기적으로 만나온 투자기관”이라며 “옆에서 지켜본 결과 중장기 투자를 하는 성향의 투자자로 엘리엇과는 성향이 다르다”고 말했다.

헤르메스와 함께 삼성정밀화학의 지분을 사들인 5개 펀드도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투자자와는 다른 온건 성향이라는 입장이다. 공시에 따르면 참여한 펀드는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펀드인 바클레이스액세스, 덴마크 연기금 AP펜션이 운영하는 아시아펀드 등이다.

삼성정밀화학이 삼성그룹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경영권 이슈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올 1분기 말 기준 삼성정밀화학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그룹 계열사는 에스엔폴(100%), 에스티엠(58%), 한덕화학(50%) 등이다. 이들 중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줄만한 기업은 없다.

삼성정밀화학 저평가…시세차익 노린 단순투자?

헤르메스가 삼성정밀화학의 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투자를 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삼성정밀화학은 증권사 전문가들로부터 저평가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3일 기준 삼성정밀화학의 시가총액은 9228억원으로, 1분기 기준 순자산가치 1조1949억원보다 적다. 이날 삼성정밀화학은 3만6000원에 마감했다.

정용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삼성정밀화학은 영업이익 흑자전환 시점에 대한 시장의 우려와 투자 재원의 활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평가 받고 있다”며 “삼성정밀화학의 주가는 과거 3년 평균 PBR 1.1배를 10% 할인한 4만8000원이 적절하다”고 분석했다. 삼성정밀화학은 지난 1분기 매출액 2748억원, 영업손실 88억원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주력 자산 매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판매량이 늘면서 올해 흑자전환을 예상하고 있다. 이학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최대주주인 삼성SDI에 공급하는 물량이 늘면서 실적 개선이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회사 지배구조도 탄탄한 편이다. 실제 삼성정밀화학 지분 31.1%를 삼성그룹 주력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삼성정밀화학 지분 8.4%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SDI는 14.7%, 삼성물산은 5.6%, 삼성전기가 0.3% 보유 중이다.

입장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과거 '먹튀' 전력

다만 일부에서는 헤르메스가 입장을 바꿔 엘리엇처럼 삼성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헤르메스가 국내 기업의 지분을 사들인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4년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지분 5%를 취득했다. 당시 주식매입 목적을 '단순투자'라고 명시했지만, 경영권에 개입하겠다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삼성물산 경영에 간섭했다. 한때는 적대적 인수·합병 의사까지 내비치면서 주가를 띄운 후 지분을 매각해 380억원의 차익을 거두고 떠났다. 이때문에 헤르메스를 ‘온건 성향의 투자자’라고 볼 수 만은 없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헤르메스는 마음만 먹으면 정정공시를 통해 투자 목적을 ‘경영참여’로 바꿀 수 있다. 삼성정밀화학 관계자는 “경영목적을 바꾸면 의결권이 제한되고 주식을 추가로 취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했지만, 의결권 제한과 주식 추가 취득이 금지되는 기간은 5일에 그친다. 그 이후에는 얼마든지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 헤르메스는 공시에 지분 변경 사유를 빈칸으로 남겨뒀다.

증권 업계 관계자들은 엘리엇의 자문을 맡은 넥서스가 헤르메스의 자문을 맡았다는 점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넥서스 측은 “오래전부터 헤르메스의 법률 자문을 맡아왔다”며 “우연의 일치”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해외 투자자본의 국내 기업 공격이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 대표는 "국내 기업들을 노린 해외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격이 앞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기업 규모에 비해 지배구조가 부실해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