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실에 앉아 파도타기(서핑)를 배우고, 파리 루브르박물관 내부와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자연의 풍광(風光)을 마치 그곳에 직접 간 것처럼 둘러본다. 아직 뼈대만 있는 건물에 들어가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의 내부 모습을 살펴보거나, 부동산 중개 사무소 소파에 앉아 새집의 인테리어를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체험해 보기도 한다. 내가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게임 속 세상을 활보하는가 하면, 수천㎞ 떨어진 곳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고레티 병원의 어린이 환자들이 삼성전자의 ‘기어 VR’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놀이기구를 실제로 탑승한 듯한 가상현실 체험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360도 전방위(全方位) 촬영이 가능한 가상현실 카메라 ‘프로젝트 비욘드’를 이용해 롤러코스터 등 20여개 놀이기구의 탑승 장면을 촬영한 뒤 병 치료 때문에 외출을 못하는 어린이 환자들에게 가상현실로 보여줬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 기술이 이미 바꿔놓은 우리 생활 속 모습이다. 대학이나 연구소에 설치된 거창한 3차원 영상기기가 필요했던 일이 이제는 스마트폰과 20만원대의 가상현실 기기(VR헤드셋)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덕분에 가상현실은 이제 기업들이 연구개발과 마케팅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교실과 게임센터(오락실) 등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의 상업화에 불이 붙으면서 앞으로 5년 내에 전 세계 가상현실 기술 관련 시장의 규모가 1500억달러(165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아직 짓지도 않은 집을 둘러본다

① UC샌프란시스코 연구진이 스마트폰과 VR 헤드셋을 이용한 가상현실 기술로 아직 설계도만 있는 건물의 내부 모습을 미리 둘러보는 장면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 UC샌프란시스코 제공 ② 스마트폰과 VR 헤드셋을 이용해 저렴하게 가상현실을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건설 현장에서 도면으로 파악하기 힘든 설계상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있다. / 칼자이스 제공 ③ 학교 교실에서 3D기구를 통해 파도타기를 배우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④ 실감나는 3D 게임을 즐기는 등 우리 생활에서 가상현실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축 건물. 겨우 뼈대만 서 있지만, VR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완공된 건물 안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복도와 방을 오가며 공간의 넓이·모양·창문의 위치 등을 확인해 보고 기둥이 동선(動線)을 가리지 않는지, 화장실이나 비상계단의 위치를 이용하기에 적당한지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미국 UC샌프란시스코 연구진이 지역 건설업체들과 손잡고 개발한 가상현실 기술 덕분이다.

연구진은 건물 설계도와 내부 공간 배치도, 인테리어 계획서 등을 바탕으로 건물의 정교한 3차원 지도를 만들어 이를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과 가상현실 기기에 집어넣었다. 몸이나 머리를 움직이면 스마트폰의 위치 센서와 방향 센서가 사용자의 건물 내 위치와 바라보는 방향을 정확히 측정해 여기에 알맞은 영상을 보여준다. 내가 마치 영화나 게임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연구진은 "실제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는 듯한 경험을 통해 도면 상에선 발견하기 힘든 (설계상의) 문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며 "잘못된 설계나 뒤늦은 구조변경으로 낭비되는 비용과 시간을 크게 절감할 수 있어서 건설회사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업체들은 아파트 구매자들에게 아직 짓지도 않은 집을 구경시켜 주는 데 이런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하고 있다. 소파에 앉아 VR 헤드셋을 쓰면 실제 집에 들어온 것과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조이스틱을 움직여 집 안 곳곳을 살펴볼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방의 공간감을 느껴보고 머리를 들거나 숙여서 천장과 바닥의 느낌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벽지나 가구 등 인테리어가 맘에 안 들면 다른 옵션을 적용한 화면을 눈앞에 띄워 달라지는 점을 즉석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최근 분양을 시작한 미국 뉴욕의 '더 그랜드 앳 스카이뷰 파크'와 시애틀의 '루마(Luma) 타워' 등 고급 아파트에서 이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시애틀 루마 타워 분양 담당자 수지 모리스씨는 "모델하우스를 짓는 것보다 비용은 훨씬 적게 들면서 고객들의 반응은 더 좋다"고 말했다.

교실에 앉아 루브르와 만리장성을 견학

가상현실 기술은 교실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1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변두리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파도타기 강습을 열었다. 이 회사의 갤럭시 스마트폰이 장착돤 '기어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서핑보드의 움직임을 흉내내는 장치 위에 올라타면 바다 위에서 진짜 파도를 타는 듯한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브라질 출신의 세계 서핑 대회 챔피언인 가브리엘 메디나(Medina)가 아이들에게 파도타기를 가르쳤다.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면 굳이 바닷가를 찾지 않아도 파도타기를, 스키장에 가지 않아도 스키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실에 앉아 수천㎞ 떨어진 외국의 명소나 숨막히는 자연광경을 직접 견학(見學)하는 듯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 구글의 '익스피디션스(Expeditions)'라는 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박물관의 내부, 중국 만리장성의 전경,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등의 가상현실 콘텐츠를 학교 수업용 교재로 만들어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구글은 최근 미국과 영국, 가나의 초등학교에서 이를 직접 시연해 보였다. 삼성전자도 '프로젝트 비욘드'라는 가상현실 콘텐츠 도구를 이용, 이탈리아의 어린이 환자들에게 20여개의 놀이기구를 가상현실로 체험시켜 주는 행사를 열었다.

실생활에서 가상현실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게임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대형 쇼핑몰 '웨스트필드'에서는 인기 모바일게임 '앵그리버드'를 가상현실 게임으로 만들어 시연 중이다. 삼성전자의 '기어 VR'을 머리에 쓰면 게임 속의 새를 쫓아 실제로 날아가는 듯한 화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값비싼 3D(입체) TV가 없어도 실감나는 3D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어 VR을 통해 보는 가상현실 화면의 원리는 1인칭 시점의 컴퓨터게임 화면과 같기 때문에 구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서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저렴해진 VR… 5년 내 수백조원 시장 될 것

VR이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들게 된 데는 스마트폰과 VR 헤드셋을 결합해 저렴하게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게 된 덕이 크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보급된 VR 헤드셋 중 하나인 삼성전자 '기어 VR'은 미국 내 판매 가격이 199달러(22만6000원) 정도다. 해외에서는 이를 흉내낸 5만~6만원짜리 '짝퉁' 제품들도 쏟아지고 있다. 구글은 종이로 만든 '카드보드'라는 가상현실 제품을 내놓기도 했는데, 단돈 20달러짜리다.

누구나 맘만 먹으면 손쉽게 가상현실 기술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장조사 및 M&A(인수·합병) 컨설팅업체 디지캐피털(digi-capital)은 오는 2020년에 글로벌 가상현실 시장의 규모가 1500억달러(165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가상현실 업체 에코픽셀(EchoPixel)의 창업자 세르지오 아기레(Aguirre)는 "이러한 예측은 의료와 재난 대비, 교육 분야의 시장성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라며 "앞으로 기업·학교·가정에서 다양한 용도의 VR 기기를 갖추게 됨에 따라 관련 콘텐츠 시장이 폭발하면서 실제 시장 규모는 지금 예상의 몇 배로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