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북도 상주 산골짜기 마을에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태어났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논밭을 뛰어다녔고, 중학교 때까지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 불우했던 시대 환경 때문에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은 교육에 힘이 있다고 생각한 깨어 있는 분이었다. 특히 큰아들인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교육을 시키셨다. 교육이라 해봤자 농사일과 집안일에서 좀 빼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한참을 걸어가 완행 기차를 타면서 왕복 세 시간이 걸렸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당시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피로가 몰려오기도 했다.

어렵게 공부해 들어간 김천고등학교에서 나는 운명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음악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진로가 있어. 꼭 남들이 가는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렴. 자신만의 길을 찾아 그 길에서 1등을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단다."

지난 11일 낮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한국암웨이 본사에서 박세준 대표가 지구본을 가리키고 있다. 박 대표는“45년 전‘자신만의 길을 찾아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이정표(里程標)가 됐다”며“동기들이 국내 대기업을 선택할 때 외국계 기업을 선택하고 외국어 실력을 나만의 장점으로 키운 게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는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줬다.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농촌 지역에서는 진로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출세하는 길은 그저 법대에 진학해 판·검사가 되거나,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정도만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음악 선생님 덕분에 다른 여러 진로가 있고 도전을 해볼 만한 여러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됐다. 이후 나는 안주하기보다는 도전하는 선택을 자주 했다.

지방 국립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교육학을 전공하면서도 남들은 별로 관심이 없던 특수교육 과목에 집중했다. 특히 언어와 시력 중복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헬렌 켈러에게 자신의 장애 극복 경험을 통해 밝은 빛의 세상으로 이끌어내 준 앤 설리번 선생님의 교육철학을 접하고는 많이 놀랐다. 그래서 언어 치료 쪽을 학문적으로 깊이 공부해 언어 교정을 가르치는 교수가 돼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했다.

대학원을 마친 뒤에는 교수가 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면서 대구의 동산병원에서 언어교정사로 근무했다. 이때 한국에 온 미국 평화봉사단에 통역을 해 주고 간단한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때 훗날 주한 미국 대사가 된 캐슬린 스티븐스(한국명 심은경)를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내게 미국 유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 대학에 입학 허가는 받았는데 풀브라이트 장학생 선발에서 떨어진 것이다. 미국 대학의 값비싼 학비에다 생활비를 5년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길을 찾았다. 유학을 위해 공부한 영어를 써먹기 위해 미국 회사에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당시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입사했다. 국내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은행에서 처음에는 인사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서울의 명문대 출신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만의 특장점,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1980년대를 맞으면서 은행에서는 전산(電算) 담당자가 필요했으나, 모두 이 업무를 꺼렸다. 당시만 해도 전산은 은행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고, 잘해도 표가 안 나고 잘못되면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혼자 달려 1등을 할 수 있는 분야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전산 담당 부서에 자원했다. 공대 출신도 아닌, 인사를 담당하던 사람이 전산 업무에 지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전산 부문에서 일함으로써 인터넷 시대에 앞서갈 수 있는 핵심 역량을 쌓을 수 있었다. 나는 전산 근무 경험을 무기로 일본 파견 근무도 할 수 있었다.

한국암웨이에 입사하게 된 것은 내가 갖고 있던 편견과도 부딪치는 선택이었다. 암웨이는 불법 피라미드와 같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국민적 감정이 좋지 않았다. 주변의 만류도 심했다. 그럼에도 입사를 결심한 것은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알아나 보자'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암웨이라는 기업이 궁금해 서점에 가서 관련된 책을 찾아 읽기도 한 뒤 결국 인사 담당자로 일을 시작했다.

주변 우려와 달리 나는 잘 적응했다. 특히 그중 보람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국내에 반미(反美)감정이 깊어지고 수입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암웨이에는 날벼락이었다. 당시 한국암웨이는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만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금 장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회사를 찾아왔다. 염전을 하면서 몇 년 동안 연구 개발 끝에 신라시대부터 사용한 항염(抗炎) 효과가 뛰어난 소금을 복원해냈는데, 외환위기 때문에 작은 회사의 제품은 받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미국 본사에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한국에서 암웨이가 뿌리내리려면 어려울 때 한국 기업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로서는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미국 본사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현지에서 생산된 제품을 암웨이 유통망을 통해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을 발전시켜 암웨이의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우리 중소기업 제품들도 하나씩 소개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사한 지 6년 만에 내가 CEO(최고 경영자)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돌출적인 제안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던 것 같다.

이후 지금까지 14년째 CEO로 일하고 있다. 막혔을 때 다른 길을 찾고 남들이 안 하는 선택을 한 내 인생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신만의 길을 찾아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45년 전 선생님의 말씀은 내 인생에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됐다.

[박세준 대표는]

박세준(朴世俊·63) 한국암웨이 대표는 경북대 교육학과 졸업 후 경북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한국암웨이 이사로 입사했고 2002년 대표이사로 승진해 14년째 현직을 맡고 있다. 한국에서 효과적인 현지화 정책을 추진해 한국암웨이가 전 세계 100여개 암웨이 법인 중 두 번째로 큰 법인으로 성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1년부터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이사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