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생태계에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서울 시청 맞은 편 국세청 별관 건물은 철거 중이고, 세종대로 사거리 글로벌 6성급 포시즌은 완공 중이다. 영국대사관으로 일부 막혀있던 덕수궁 돌담길이 머지 않아 시원하게 뚫리는가 하면, 새문안엔 13층 규모의 대형 교회가 신축 공사를 앞두고 있다. 역동적으로 표정을 바꾸는 도시의 진화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했다. [편집자주]

도시의 재탄생을 위해 매일 매일 국세청 별관 건물은 조금씩 허물어 지고 있다. 붕괴의 현장은 조용하다. 건물 뒤에서 보면 뒤통수에 난 바리깡 자국같지만, 다행히도 무소음 무진동 공법이다. “주요 문화재인 덕수궁과 성공회 성당이 지척에 있어서 철거 소음을 최소화 하도록 설계했어요.” 서울 시청 도시재생본부 천주영 주무관의 설명이다. 동시에 성당 마당의 테이크아웃 미니 카페도 리모델링 중이다. 공사장 인부는 성당이 광장으로 데뷔하기 전에 ‘예쁘게 꾸미는 중’이라고 했다.

2000년대 이후 광화문은 여러 차례 풍경의 변화를 겪어왔다. 화가 강익중의 거대한 달항아리 그림막 뒤에서 새로 태어난 광화문(2010년), 미래적인 유리조형물로 얼굴을 바꾼 서울 시청(2012년), 끔찍한 화재 이후 재건된 남대문(2013년), 그리고 2015년 6월 현재 국세청 별관 건물(일제 시대 체신청)이 철거 중이다.

서울 시청은 그라운드 제로, ‘비움의 장소성’을 선택했다. 국세청 별관 건물이 철거되고 잔디 광장이 조성되면, 서울시 도서관, 서울시의회, 성공회 성당을 중심으로 하늘 위로는 근대 서울의 원풍경이 회복되고, 땅 위에는 새로운 광화문 생태계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국세청 별관 철거 이후의 세종대로 조감도. 8월 초, 성공회 성당 앞이 잔디 광장으로 조성되면 성가수녀원, 조선일보사로 이어지는 도심의 골목길이 열린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새로운 풍경이 드러난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공회 성당과 한옥 대문이 기품 있는 성가수녀원, 독일 공립 학교처럼 단호한 붉은 벽돌의 조선일보사가 늘어선 격조있는 언덕길은 지금까지 국세청 별관에 가려져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정갈한 신부복을 입은 사제들, 노트북을 맨 지식 근로자들이 오가던 이 골목에도 스마트폰을 든 도시 여행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7년 이후 C스퀘어 빌딩과 태성 빌딩리모델링 과정에서 고급스럽고 트렌디한 가게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부터다.

화강암 외벽과 붉은 벽돌, 선명한 주황색 지붕이 고풍스러운 성공회 대성당(서울교구 주교좌 성당, 중구 정동 3번지)은 6.10 항쟁이 발발한 민주화 성지다. 영국 건축가 아더 딕슨의 설계로 1926년 미완의 건축물로 존재하다가, 1996년 국내 건축가 김원이 도면대로 완성했다.

성당 맞은 편엔 작지만 개성 있는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다. 햇빛 좋은 날엔 가정식 이탈리안 레스토랑 예환의 은은한 올리브 오일 향기가, 비오는 날엔 중식당 열빈의 매운 낙지 짬뽕 냄새가 거리를 채운다. 불과 500m에 못 미치는 언덕길은 짧아서 더욱 매혹적이다.

95년동안 어김없이 신문을 조판해온 거대한 붉은 성채의 조선일보 미술관, 언론 지식인들의 에너지가 천고를 울리는 덴마크식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까페 아모카, 만선의 항구로 들어온 것 같은 흥분을 주는 사조 빌딩, 그 앞에 비밀의 통로처럼 나타난 예술 영화관 스폰지하우스... 이곳의 풍경은 다문화가 공존하는 베를린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근대의 옷을 입고, 트렌디한 이미지로 화장했지만, 이 골목은 구석구석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사라질 국세청 별관 건물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의 신주를 모셨던 덕안궁터다. 성공회 성당 앞 도로엔 조선 세조의 사저로, 이후 비빈들이 살게 했던 곳을 알리는 '명례궁 터' 표석이 남아 있다.

금융회관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사조 빌딩은 조선시대 중등교육의 불꽃이 피어난 서학당터다. 귀를 기울이면 근대의 목소리도 들린다. 뒷쪽 새문안에 자리한 덕수초등학교는 1926년 출력 1kw로 대한민국에서 첫 주파수를 쏘아올린 경성방송국 자리. 방송 한류의 물꼬가 시작된 곳이라 의미 깊다. 성공회성당 안쪽의 컨퍼런스 레스토랑인 달개비식당은 안철수 문재인의 단일화 회동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그 역사의 스토리텔링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성당 언덕길이 공개되는 것에 상인들은 사실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중국 관광객과 시위 인파로 이 호젓한 거리가 몸살을 앓을까 하는 우려다. 나아가 일명 ‘뜨는’ 거리가 되면 반사적으로 오를 임대료도 문제다. 이미 가로수길, 한남동, 연남동을 비롯해 북촌과 서촌이 그 전철을 밟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광풍은 개성 있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성형도시처럼 표준화된 자본의 풍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에서 주목할만한 시그널은 아직 잡히지 않는다.

조선일보 미술관 맞은편 C 스퀘어에 자리 잡고 이 언덕을 트렌디하게 만든 카페 아모카 송혜조 사장은 앞으로도 성공회 성당 주변에 엄청난 변화는 없을 거라고 본다. “건물 구조상 이 동네에 옷가게나 대형 식당이 들어와서 상업 지구로 개발되기는 힘들죠. 지금 이 상태가 최적의 그림이예요. 적절한 상업공간, 적절한 여백, 역사적인 명소가 어우러진 채로 말이죠.”

정오가 되면, 이곳 세종대로에는 성공회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평화롭고 명료한 주파수다. 밀레의 만종 속에 나오는 농부들처럼 새벽부터 광화문의 인터넷 농지를 일구던 도시
근로자들은 종소리에 맞춰 책상 위로 몸을 일으킨다. 8월 초, 성공회 성당은 세종대로 광장으로 그 고즈넉한 몸채를 드러낼 것이다.

비로소 근대의 종소리와 현대의 디지털 시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도시의 존엄성이 전면으로 부각될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미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은 시청에서 성공회 성당으로 이어지는 광장의 풍경 속에서 치루리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두 개의 광장이 열리면, 광화문 생태계에 어떤 지각 변동이 일어날 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어쨌든 유서 깊은 성공회 성당길이 더 많은 도시 여행자들에겐 흥미로운 탐험지가 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