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기 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바라본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묘소는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다. “성호 이익선생 묘[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라는 비석마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실학의 대종(大宗)이 이렇게 소홀히 다뤄져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정부인(貞夫人)'이라는 비석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정2품 벼슬아치 부인에게 주는 정부인이라는 호칭을 쓰다니. 이익 선생은 평생을 처사(處士)로 지냈고, 기껏해야 영조 때 첨지중추부사(정3품)라는 관직을 명예로 주지 않았던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즉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았다. 고종4년(1867년)에 정2품의 정경(正卿) 벼슬을 추증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말하자면 이 비석은 1867년 이후에 새겨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실학 대종’의 묘소

묘소 옆에 돌로 쌓은 사당의 담 벽을 몇 바퀴나 빙빙 돌면서, 처사(處士) 즉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그에게 정경벼슬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와 형을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잃고(이익의 학문적 스승이기도 한 둘째 형 이잠(李潛)은 성호의 나이 26세 때, 송시열 등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 벼슬길을 걷어 차 버린 그에게 재상 벼슬을 추증하는 것은 오히려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그의 책 ‘성호사설’ 11권을 꺼내면서 문득 ‘성호 이익이 한국형리더십과 대관절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또는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들의 리더십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이 국토순례 여행에 왜 이 곳이 포함되었는가. 작은 고을 하나도 맡아서 다스려 보지 않은 그에게 리더십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오래지 않아서 풀렸다. 국역본으로 3700여 쪽의 ‘성호사설’ 도처에서 발견되는 이익의 위정자 및 국가경영에 대한 냉철한 분석 및 대안을 보면, 과연 이 책이 260여 년 전에 쓰인 것인가 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숙종과 영조 시대는 노론의 장기집권 체제 하에서(정치), 풍요롭지만 빈익빈부익부가 가속화 되는(경제) 시기였다.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따라서 가산(家産)까지 점점 기울어가는 처지의 ‘주변부 지식인’이었기에, 그의 눈은 더욱 날카로웠고 대안은 적실(適實)했다.

성호사설

‘주변부 지식인’의 눈으로 살핀 18세기 조선 사회

그는 당시의 국가가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다고 진단했다. “곡식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신분 높은 이들이 얻어먹고 산다. 따라서 칼자루를 응당 낮은 신분이 잡아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 반대다. 비유하자면 곡식과 쇠붙이를 서로 바꾸는데, 쇠붙이 만드는 자가 힘이 강해서 자기의 싼 물건을 주고 강제로 곡식을 강매하는 것과 같다. 하물며 조정은 그러한 것(쇠붙이)도 없이 백성들에게 그냥 빼앗으니, 이는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성호사설 5권 185-186쪽).

이익은 요즘의 청문회와 같은 서경(書經) 제도의 폐단도 지적했다. “지금 사헌부 관리가 서경을 할 때 자신과 아내의 사조(四祖: 부친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조사하여, 미천하거나 오점을 남긴 자가 있으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것이 그 사람의 재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공연히 문벌만 숭상하는 풍습을 조장시킬 뿐 아무런 실익이 없다”(성호사설 5권 215쪽)는 말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남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 수 없을뿐더러, 시대를 말하는 사람이 곧 시대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현명한 임금은 어진 신하를 대우할 때, 조그마한 잘못으로써 큰 덕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고, 뭇 사람이 지껄이는 것으로써 원대한 계획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익은 그렇게 해서 ‘성과를 거둔’ 사례로 고구려의 대신 을파소(乙巴素)를 들었다. 즉 고국천왕이 농사꾼 을파소를 추천 받아 지배세력들의 회의체 의장격인 국상(國相)으로 발탁했을 때 기득 세력들의 반발은 대단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를 강력히 지지하여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게 하는 등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신분이 아닌 능력 위주의 인재 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이익의 생각이었다(성호사설 5권 25쪽).

소통되지 않는 울결한 나라, 조선을 개혁하기 위한 방책

이익은 당시 조선을 울결(鬱結)한 나라라고 진단했다. 울결이란 소통되지 않아서 폐색(閉塞)된 상태를 가리키는데, 당시가 “풀씨도 점점 감해지며 나무도 자라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금 세상의 울결한 일을 대강 손꼽아 본다면, 그 습속이 인재를 천대하여 어진 이를 반드시 물러가 숨게 만들고, 그 풍습이 문벌을 숭상하고 서얼과 중인을 차별하여 백세 후까지도 청요직[淸宦]에 못 오르게 한다. 또 서북 삼도(西北三道 :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사람을 써주지 않은 지 벌써 400여 년이 되었으며, 노비법으로 그 자손은 차별을 두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성중의 울결한 기운이 10분의 9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성호사설 4권 226-227쪽).

그가 제시하는 관료제 개혁안은 단순하면서도 실질적인 것이었다. 단순하다는 것은 명실이 서로 일치되게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가 중심이 되고 국정의 중심처인 의정부는 허수아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원래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한 예다. 실질적이라는 것은 인재들에게 환영 받고 백성들에게는 실제 혜택을 주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도움 주는 관료제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만 남기되, 그들에게는 후한 녹봉을 주어서 백성들에게 사사로이 거두는 일이 없도록 하는’ 창업(創業) 수준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대소 관서 모두 두 곳이나 세 곳을 하나로 병합하고, 꼭 필요한 인력 외에는 모두 혁파하며, 5일의 휴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숙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성호사설 5권 276-277쪽).

‘성호사설’의 핵심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지금까지 살핀 인재 쓰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의 방법이다. 이 책의 구성이 ①인사(人事) ②천지(天地) ③만물(萬物) ④경사(經史) ⑤시문(詩文)의 다섯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것에서 보듯이, 그의 더 큰 관심은 천지와 만물, 그리고 경전과 역사 및 시문 등 공부에 집중되어 있다.

성호 이익의 묘소

말이 죽은 이유를 설명하는 학문에서 말의 죽음을 예방하는 학문으로

그에게 공부는 곧 나랏일을 잘 되게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었는데, 선비의 공부는 궁극적으로 국정의 최종 결정권자인 왕의 ‘마음을 열어서 풍부하게 만드는 것[啓心沃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성호사설 5권 188쪽). 그러기 위해서는 선비가 먼저 공부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 비유가 흥미롭다.

“학업에 있어,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을 때는 상서로운 봉황새[祥鳳]가 우연히 산모퉁이에 이르렀는데, 내 걸음이 느려서 혹시 못 볼까 염려하는 것 같이 안타까워하고, 이미 발견했을 때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오랫동안 잃었다가 다시 만난 것 같이 해야 한다. 학업을 강론함에 있어서는 자식이 병들었을 때 유명한 의원을 찾아가 묻는 것 같이 해야 하고, 마음으로 얻은 바가 있을 때에는 무더운 길에서 심한 갈증으로 고생한 사람이 맑은 물을 얻어 마시는 것 같이 해야 하며,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보검(寶劍)을 갈아서 시험 삼아 베어 보는 것 같이 해야 한다”는 구절이 그것이다(성호사설 5권 196쪽).

이익은 이런 학업의 태도를 눈과 입과 마음과 손이 모두 일치하는 공부법이라고 말했다. 즉 “눈으로 보고(眼頭過) 입을 굴리고(口頭轉) 마음으로 융통하며(心頭運) 손으로 놀리는(手頭措)” 온 몸 공부법을 그는 몸소 실천했으며, 그 결과 정치 · 경제 · 문학 · 국방 · 과학은 물론 서양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섭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의 ‘성호학(星湖學)’을 열어 놓았다.

나는 그가 후대에 ‘경세치용학파의 대종(大宗)’(이우성 1963)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온 몸으로 공부에 몰입하는 이 방법과 함께, 국가경영에 도움 되는 학문을 중시한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말(馬)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내놓지만, 정작 중요한 것, 즉 ‘어떻게 하면 말이 죽지 않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성호사설 5권 204쪽). 그는 “첫 새벽에 닭 울음을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백성들로 하여금 즐거이 가정을 꾸리는 행복(樂於家室)을 누리게 하는 방안을 궁구하였다(성호사설 5권 304쪽 ; 8권).

이익은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울결한 사회를 소통시킬[決鬱]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즉 공부에 집중하여 마침내 학문의 큰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성호사설’ 외에도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저술이 안정복, 정약용 등 숱한 인재에게 영감을 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극히 평범하지만 지극히 위대한 그의 묘소를 뒤로 하면서 언제나 우리는 ‘말을 죽지 않게 하는 학문’을 치열하게 하는 풍토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