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VC)은 벤처 생태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창업 초기 기업에 수억~수십억원의 자금을 대서 숨통을 터주기도하고,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회사에 투자해 업계 1, 2위 중견·대기업으로 키워내는 역할도 한다.
벤처 투자는 또한편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어떤 기술과 비즈니스가 성공할지,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해 낼 수 있을지를 내다보고 그에 맞는 기업을 골라 투자한다.
이런 벤처투자자들이 보고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국내 대표 벤처캐피털리스트 여섯 명을 만나, 현 시점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산업의 미래와 유망한 기술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편집자주]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국내 지주회사인 소프트뱅크코리아의 자회사다. 지난 2000년 설립된 이래로 알리바바, 야후코리아를 비롯해 게임 개발사 넥슨·선데이토즈·데브시스터즈, 엔터테인먼트 업체 키이스트 등에 투자했다.

문규학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1996년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소프트뱅크벤처캐피탈에 입사하며 그룹에 합류했다. 2000년에는 한국 내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로 자리를 옮겼고 2002년부터 대표이사직을 맡아 투자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5월 초 ‘황금 휴일’이 끝난 직후인 6일,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문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 준비 때문에 휴일인데도 맘껏 쉬지 못했다”면서도 ‘5년 뒤 유망할 기술’을 분야별로 세분화해 상세히 분석해왔다. 직접 준비한 자료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더 나아가 미디어 분야까지 다루고 있었다.

그는 '유망할 기술'을 판단하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없던 가치를 새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며, 두번째는 아무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술'이란 평판 디스플레이와 같이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냄으로써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스마트폰의 출현을 가능케 한 기술을 말한다. '아무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푸는 기술'은 예를 들어 스모그 현상을 해결하거나 지진 날짜를 미리 예측하는 등의 기술을 뜻한다.

문 대표는 우리나라 벤처 산업 내 쏠림 현상이 심한 게 다소 아쉽다고 지적했다. 창업 열풍이 ‘소셜커머스’나 ‘핀테크’ 등 특정 분야에 지나치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부품·소재 분야에서는 2000년대 중반 피처폰 시대에 비해 경쟁력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 인프라·소재·부품

문 대표는 IT 산업을 크게 네 묶음으로 나눠 5년 뒤 유망할 기술을 예측했다. 인프라와 소재·부품 기술, 디바이스(기기), 콘텐츠·서비스 등 세가지 분야로 나눈 뒤 마지막으로 IT 응용·융합 분야를 따로 분류했다.

① 통신 장비

문 대표는 IT 인프라·소재·부품 분야에서 가장 먼저 백본(backbone·소형 회선들로부터 데이터를 모아 빠르게 전송할 수 있는 대규모 전송회선) 통신망 관련 기술을 유망 기술로 꼽았다.

그는 “모바일도 5G로의 진화가 가속화하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백본망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선보다는 유선 네트워크에서 트래픽 잼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이와 관련, 먼저 백본망 인프라의 업그레이드가 선결돼야 하며 관련 반도체와 통신 장비 기술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100기가바이트(GB) 인터넷 칩을 하나의 예로 꼽았다.

② 마이크로 파워

문 대표가 꼽은 두 번째 인프라·부품 기술은 마이크로 파워(소규모 에너지)다. 웨어러블 디바이스(스마트워치와 같이 몸에 착용할 수 있는 전자기기)가 각광받다보면 소규모 에너지를 통한 미세 전력의 중요성이 훨씬 커질 것이란 얘기다.

그는 "지금까지의 배터리 기술은 대체로 전력 규모가 큰 산업용에 집중돼 왔으며 스마트폰용 배터리가 가장 작은 정도였으나,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보편화하면 이보 다 더 작은 나노 에너지 수준의 전력이 필요해진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체온(36.5도)을 축전해 에너지로 쓰는 기술을 하나의 사례로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인체 발열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은 약 50년 전에 나왔는데, 그동안은 그 작은 전력을 어디에 활용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는 "이젠 웨어러블 디바이스라는 활용처가 생겼으니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며 "사람들이 기기를 따로 충전하기 귀찮아할 가능성이 크니, 인체 발열 에너지를 전력으로 변환하는 기술도 발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인체 발열을 활용한 발전 기술은 아직까진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적용되고 있지 않다. 플렉서블(휘어지는) 열전소자를 만드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을 보유한 회사가 우리나라에 한 곳(태그웨어) 있다고 문 대표는 전했다.

③ IOT센서·MEMS

문 대표는 또 사물인터넷(IOT)이 확산됨에 따라 인체 센서와 미세전자제어기술(멤스·MEMS) 기술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는 산업용 센서는 많이 발달한 반면 인체 센서 기술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에요. 심장 박동수를 재는 등 단순한 센싱 기술에서 더 나아가, 예를 들면 체온이나 체열을 재거나 피부 바이러스를 발견해내는 등 미세한 기술이 발달할 가능성이 크죠.”

그는 인체 센서를 가동하려면 멤스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반도체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멤스 분야로는 진출을 별로 못 했으며, 이를 개발하던 몇개 회사마저도 중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현재 멤스 반도체 분야에서는 자동차 부품 회사로 잘 알려진 보쉬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멤스에는 특허가 많이 걸려있고 고도의 공정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후발 주자로서 진입하기가 쉽지 않으나, 반도체 설계 기술을 보유하고 있거나 칩을 디자인하는 벤처 회사는 이 분야에 뛰어들어 큰 회사에 M&A되는 걸 기대해볼 수 있다고 문 대표는 전망했다.

④ 소재

문 대표는 소재 산업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그래핀 소재를 대표적인 예로 언급했다. 실리콘보다 훨씬 물성이 좋아 나노 단위로 만들기 좋으며, 따라서 실리콘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지금으로부터 15년 후에는 그래핀이 만들어내는 시장 규모가 수백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문 대표는 전망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소재를 만드는 벤처 기업은 아직까지 드물어요. 미국이나 유럽 벤처 기업이 경쟁력을 갖고 있죠. 부품 회사와 마찬가지로 소재 기업에도 대규모 장기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 도중에 포기한 벤처기업이 많아요.”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 디바이스(기기)

① 스마트폰, 그 후

문 대표는 PC가 현재 30년 진화의 끝에 와 있듯 스마트폰의 진화에도 한계가 올 것이며, 그 시기는 PC보다 더 빨리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마트폰의 진화 기간을 15년으로 예상했다. 지난 2010년 애플 ‘아이폰’이 처음 등장했으니, 지금으로부터 5~7년 뒤면 스마트폰의 진화가 종착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스마트폰 이후의 다른 디바이스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 스마트폰 등장 이후 사람들이 PC를 버리지 않았듯 새 디바이스가 나온다 해서 스마트폰을 버리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디바이스가 등장할 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선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진화할 것 같아요. 지금의 손목 시계 수준보다는 더 발전할 거에요. 이와 관해 분명 인터페이스의 혁신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마우스와 터치까지 왔고, 음성과 동작 인식도 시도되고 있죠.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삶에 많이 녹아나는 정도는 아니잖아요. 동작 인식 같은 경우엔 향후 시장 규모가 상당히 커질 거에요.”

문 대표는 포스드(forced·압력을 가하는) 터치를 일례로 들었다. 지금의 터치는 옆으로 밀거나 끌어당기는 등 2차원적인 데 비해, 압력으로 누른다는 건 3차원 터치다. 이런 기술을 적용한다면 3차원 터치와 관련된 인터페이스, 소프트웨어, 앱 시장이 커질 수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② 차세대 디스플레이

문 대표는 디스플레이 분야에 있어서도 한번 더 혁신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과거 디스플레이 기술에 있어 중요하게 어겨졌던 요소는 주로 두께와 선명도였어요. 평판 디스플레이가 등장했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폰 위에 브라운관을 얹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는 앞으로는 두께와 선명도를 넘어서는 다른 가치를 창출할 만한 새 디스플레이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어떤 디스플레이가 시장에 나올 것인지, 그리고 그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어떤 콘텐츠와 융합돼 발전할 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말했다.

◆ 콘텐츠·서비스

① 단순화

문 대표가 콘텐츠·서비스 분야에서 주목한 가치는 바로 ‘단순화’다. 지나치게 많은 서비스가 삶에 관여하는 걸 사람들이 원치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때문에 앞으로는 반대로 뭔가를 빼 버리거나 단순화해 삶을 간결하게 해주고 의사 결정을 쉽게 해주는 소프트웨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메가 데이터

문 대표는 또 데이터 프로세싱과 매니지먼트 기술에 주목했다. 앞으로 사물인터넷(IOT) 용 기기의 연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데이터를 관리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해질 거란 얘기다.

가트너에 따르면, 오는 2020년에는 전세계 산업용·개인용 IOT 기기가 총 260억대 가량 연결될 전망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메가데이터'라고 표현했다. 기존의 빅데이터에서 더 나아간 개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와 스마트폰, PC를 IOT로 전부 연결해놨다면, 운전자들로부터 엄청난 데이터가 밀려들어올텐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이 데이터를 단지 교통 정보로 이용할 뿐 아니라 특정 연령대의 남성·여성 운전자 생활 패턴을 분석하는 데 활용해 보험료를 달리 산정한다든가 할 수 있겠죠. 중요한 건 기기 연결이 지나치게 많아 데이터가 폭주해선 안 된다는 거에요. 굉장히 수준 높은 데이터 프로세싱과 매니지먼트 기술이 필요합니다.”

③ 기업용 IT 기술

문 대표는 개인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모바일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반면 기업의 모바일화는 아직 미진하다고 지적했다. 향후 5년 뒤엔 기업의 모바일화가 더 가속화할 것이며, 이에 따라 컴퓨터·온라인 기반의 기업용 IT 기술과 서비스 또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④ 인터랙티브(interactive) 미디어

문 대표가 말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란 사람과 미디어 간 상호 작용과 관련된 개념이다. 사람들이 모바일로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지금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상호 작용이 보장된 활동을 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TV를 가리켜 “단순한 인터랙티브 미디어”라고 표현했다. 아프리카TV는 개인이 방송을 하면서 사람들의 실시간 댓글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앞으로는 이보다 좀 더 진화한 기술이 개입될 것 같습니다. 게임 요소와 콘텐츠가 결합된 기술이 나올 수 있어요. 지금은 이런 움직임의 초기 단계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소프트뱅크벤처스의 투자사 중 메가폰티비라는 벤처회사가 있는데, 게임 요소와 콘텐츠를 섞은 서비스를 개발하는 업체죠.”

◆ 응용·융합

① 무인 자동차 관련

문 대표는 무인 자동차의 경우 “좀 다른 각도로 바라본다”고 말했다. 자동차의 무인화에 그치지 않고 ‘운전하지 않을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무엇을 할 지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향후 5년 뒤엔 5년 뒤엔 무인차 안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관련해 다양한 기술이 나올 것 같다고 전망했다. 쉬운 예로 페이스북은 아마도 사람이 무인 차 안에서 네트워킹을, 구글은 검색을 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구글의 무인 자동차(자율 주행차). 구글은 올 여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의 공공 도로에서 자율주행차를 시범 운행한다.

② 뇌 과학

문 대표는 IT 응용 기술의 하나로 ‘뇌 과학’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뇌 과학은 학술적으로는 많이 발달했으나 상용화는 많이 안 되고 있는 상태다. 5년 뒤에는 뇌 과학이 컴퓨터 프로세싱, 네트워크 기술과 결합돼 굉장히 발달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물론 (뇌 과학기술 상용화와 관련한) 규제는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벤처 기업이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라면, 뛰어들어야죠.”

③ 로봇 구동체제(OS)

문 대표는 로봇이 지금까진 기계 산업에 속했지만 IT와 결합되면 로봇 OS(구동 체제)가 무엇이 될 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또 로봇 애플리케이션(앱)으로는 무엇이 나올 지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5년 뒤 유망할 IT 기술’에 대한 다양한 예측을 쏟아낸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벤처기업의 길’에 대해 얘기했다. 벤처기업의 가장 아름다운 도전은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드는 일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지만 성공만 한다면 많은 걸 누릴 수 있다고 문 대표는 말했다.

“소프트뱅크의 투자 철학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업을 찾아 투자하고 지원하겠다’는 거에요. 이것만큼 보편 타당한 진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