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연구개발) 등 전문 분야는 대기업에서 여성들이 도전해볼 만한 분야입니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올해 3월 LG그룹 인사에서 임원급 연구·전문 위원으로 승진해 '유리천장'을 뚫은 여성 4명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주인공은 전혜정(47·전자)·이형의(44·이노텍)·손현희(46·화학)·김진희(43·디스플레이)씨다. 40대 초중반에 임원으로 발탁된 이들은 "R&D·법무 같은 전문 분야는 유연함과 포용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여성의 강점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유망 영역"이라고 했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연구 및 전문 분야에서 임원급 여성 전문위원은 현재 전체의 4.8%인 18명이지만 앞으로 훨씬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4인방의 성공 비결을 들어봤다.
①끝장을 보는 끈기
LG전자 전혜정 연구위원은 여성 연구원이 희귀했던 1994년, 공채를 통해 금성사(현 LG전자) 중앙연구소에 입사했다. 음성 처리 기술을 TV·에어컨 등 가전제품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음성 인식 기술 전문가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 전자부품을 사러 다니고 친구들에게 직접 납땜해 만든 멜로디 박스를 선물하는 등 손으로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의 사내 별명은 '독종'. 새 음성 처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야근과 밤샘을 밥먹듯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번 실패를 겪었지만, 이런 과정에서 다른 회사 제품보다 차별화된 기능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직장 생활에서 가장 큰 낙(樂)이었다"고 말했다.
②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유연함
LG이노텍의 이형의 연구위원은 입사 이래 부품 소재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LG이노텍이 생산하는 카메라 모듈, 반도체 기판 등 첨단 부품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무기(無機)화합물 소재를 연구했다. 그는 나노구조 기술을 이용해 열전소자의 성능을 기존 대비 45% 향상시킨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LG연구개발상'을 받았다. 그의 큰 자산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유연함이다. 후배들과 다른 부서원들까지 "황당한 아이디어도 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선배이자 동료"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 연구위원은 "R&D 업무를 하다 보면 자신의 연구에 매몰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지만 여성 특유의 유연함과 포용력을 발휘하면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③묵묵히 한 우물을 파는 인내력
LG화학 손현희 전문위원은 편광판 제조의 핵심 분야인 코팅형 수지 분야에서 업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부산대에서 고분자공학으로 학사·석사를 받은 그는 대학 전공을 살려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 분야에서 R&D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기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한 우물을 파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며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세심한 여성들이 인내심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④독자 역량과 전문성
LG디스플레이 김진희 전문위원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학사·국제대학원 정치학 석사를 거친 뒤 5년간 아리랑 TV에서 PD 활동을 했다.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도 2년간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UC버클리 로스쿨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 국제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다 2009년 LG디스플레이 변호사로 입사했다. 김 전문위원은 "여러 사람을 만나 폭넓은 경험을 쌓은 게 변호사로서 쟁점과 상대 측의 장·단점 파악에 큰 도움이 됐다"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전문성을 키워 조직 내에서 가치를 높이는 게 긴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