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지음|한대수 사진|북하우스|312쪽|1만3500원

예술은 방귀야.
가끔 참지 못해 터져나오는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한대수(67)라는 이름 앞에는 늘 ‘한국 포크록의 대부’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의 활동 범주는 비단 가수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아티스트로 분류돼야 마땅하다.

그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저자가 한대수 자신이다. 자작곡의 가사를 한데 모으고, 그 속에 얽힌 사연까지 담았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를 비롯한 주요 작품 50여 곡의 뒷이야기가 그의 음악 인생 40년과 교차된다.

아버지의 실종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홀로 남겨졌던 어린 시절, 여자와 사랑을 나누다 어머니에게 들켜 쫓겨났던 사연, 20년 이상 함께 살던 첫 아내와의 이별, 뉴욕에서 느낀 자유, 두 번째 아내 옥사나와의 사랑, 딸을 얻은 기쁨까지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갔다. 수 차례 사진전을 연 적도 있는 그가 직접 찍은 사진도 함께 실었다. 주요 내용과 사진을 발췌 소개한다.

한대수

서문에다 이렇게 적었다.

“내 노래를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느낀 것이 ‘바로 이 책이 나의 자서전이구나’였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거나 기타를 안고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들이 멜로디가 된다. 67년을 살았으니 얼마나 많았겠는가?

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렇다. 내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아니고, 곡이 나를 찾아온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이 나의 고시원을 감싸고 있을 때 곡은 나의 영혼을 침범해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래서 나는 작곡한다.”

◆ 물 좀 주소!

데뷔 앨범 ‘멀고 먼 길’의 초판 악보집에 실린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이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1968년, 친어머니의 초청으로 귀국했다. 그때 뉴욕은 히피의 천국이었고, 그래서 나도 머리를 길게 길렀다. 명륜동 별채에서 살면서 편하게 잘 먹고, 용돈도 넉넉하게 받아 쓰고 했는데, 어느 날 여자 친구와 엉켜 있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쫓겨나고 말았다.

생활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 여자냐 남자냐 하면서 비웃지를 않나, 방송국엘 가면 펄 시스터즈니 송창식이니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모두들 나하고는 어울리지도 않았고, 내가 무슨 우주에서 온 우주인으로 보이는지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나고 답답해서 죽겠더라. 그래서 ‘물 좀 주소’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냥 화가 나서 이 노래가 나온 것이다.

◆행복의 나라

롱아일랜드 고등학교 졸업 앨범.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대수다. 그는 유일한 동양인 학생이었다.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 보세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다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 없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 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열여덟살 때,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뉴욕의 롱아일랜드로 전학을 갔다. 이유는 17년 동안 실종 상태였다가 찾게 된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고, 또 새어머니가 계셔서 나는 상당히 불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미국이라는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그 당시에 뼈저리게 느끼겠더라. 그래서 내 자신도, 우리 대한민국도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나이 열여덟 살 때, 그 사춘기 시절에 울고 웃고 싶은 마음이 이 노래에 담겨 있다.

◆ 고무신

한대수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베이스 들어오고 기타도 좀 울고 장구 때려

바람아 불어라 불고 불고 또 불어라
우리 아버지 명태잡이 내일이면 돌아온다
아이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좋아

명태를 잡아오면 명탯국도 많이 먹고
명탯국이 나는 좋아 아이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좋아

아 명탯국을 먹고 나서 명태가 몇 마리 남는다면
나머지 명태를 팔아서 고무신을 사서 신고
저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촌색시 만나러 간다
아이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좋아

“나는 리어카에 기타와 카메라를 싣고 성균관대학교 뒤에 있는 꼬마 하숙방에 앉아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안 보였다. 돈도 없고, 음악도 희망이 안 보였고, 여자들에게 봉사 활동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투 코드(C와 F) 형식으로 나의 절망을 신나는 희망으로, 경쾌하게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하고 작곡했다.

서울 탤런트 여인을 촌색시로 바꾸고 핵물리학자 아버지를 명태잡이 할배로 바꾸고 내 인생을 역설적으로 비꼬았다. 내가 만약 고무신을 신은 촌놈이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래서 고무신 노래가 탄생했다."

◆ 아들아 내 아들아

1969년 서울 명륜동. 엄마 집에서 쫓겨나 자취하던 시절

아들아 내 아들아 내 말 들으세 내 말을 이- 히히히
내일 아침 해 뜨면 날 떠나겠지 가겠지 이- 히히히
저 긴 강 건너가면 높은 건물들 있다네 이- 히히히
차와 술 취한 여자 조심하여라 조심해 이- 히히히
아들아 내 아들아 날 잊지 말게 이 몸을 이- 히히히

“어머니한테 쫓겨난 후 살던 단칸방 달동네의 집주인 아줌마는 고통에 시달리는 여자였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매일 막걸리에 취해서 12시 통행금지 5분 전에 귀가했다. 집주인 아줌마는 상당히 매력적인 40대 여인이었지만 절망 속에서 하소연하며 살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희망, 명랑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만약 희망의 아들이 아줌마를 떠나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얼마나 슬퍼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작곡했다.”

◆ 나 혼자

’무한대’ 앨범 녹음 때, 왼쪽부터 김영진, 손무현, 김민기

어느 날 그인 말했지 우리의 사랑 뜻이 없다고
떠나는 그 모습에 나 혼자 그냥 말없이

무엇이 진실인가요 무엇이 시련인가요
한평생 그대 위해 바쳤지 이젠 나 혼자

닫히는 그 문소리에 시간도 가는 줄 몰라
오른손 마주 잡은 그 언약 이젠 연기로

내 희망 미래 어디에 꿈속을 헤매었나요
사랑은 사랑으로 인생은 내 길이요

‘무한대’ 앨범은 20년 동안 함께했던 부인 명신과 이혼한 직후 녹음한 앨범이다. 마흔이 되자 우리는 괴물이라 불리는 권태기를 맞았다. 나도 그녀의 친구인 보니와 열정적인 관계를 가졌고, 그녀도 결국 자기 밑에서 일하는 15세 연하 금발의 독일 모델과 사랑에 빠졌다.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기엔 남자는 ‘바람을 피우지만’ 여자는 ‘사랑에 빠진다.’ 즉,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떠난다. 새로운 남자가 생기면 과거 남자는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만 들려도 짜증낸다. 하지만 남자는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자기 고문을 한다. 그것이 나였다.

방향을 잃었다. 이 무렵 신세계 음반사 사장에게 연락했더니 윤 사장이 말했다. 새 앨범 녹음하자고. 프로듀서 윤태윤은 당시 최고의 세션 음악인 손무현, 김영건, 김민기, 송홍섭, 이병우 등을 참여시켰다. ‘나 혼자’는 송홍섭씨가 바그너의 탄호이저 분위기가 나게끔 극적으로 편곡했다. 너무나도 슬퍼서 시원했다.

◆ White Woman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제공

White woman can I come home with you
White woman can I belong to you
Whit woman can I sip tea with you

I see you walking down the street
You know you're jewel of the crown
Can I hold you into my arms
You know you won't be had
White white white woman

White velvet, white satin, white secrets, white woman

뉴욕은 102종의 인종이 살고 있다. 대부분 못 생겼지만, 0.1퍼센트는 정말 미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온갖 피부의 여인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왕관의 보석은 금발 백인 여자다.

이 노래는 Naughty, Hauty, 즉 장난스럽고 오만한 백인 여자, 그렇지만 왕관의 보석 같은 여자를 노래했다. 우리 여자들도 금발로 염색하지 않는가?

◆ 아무리 봐도 안 보여

뉴욕 김영순 댄스 컴퍼니, 한대수의 음악을 춤으로 표현했다.

기야 기야 이여워
이야 기야 기여워

허여 디여 기여워

아무리 봐도 안 보여
아무리 봐도 안 보여

안 보여 안 보여
아무리 봐도 안 보여

양희은이 뉴욕에 왔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다. “형, 나 뉴욕 왔어. 만나자.”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밥도 먹고 또 수많은 뉴욕 박물관을 함께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암에 걸리고 말았다. 치료 불가라는 진단을 받은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차이나타운에서 온갖 약과 처방을 받았다.

“내 마지막 녹음일 거 같애.” 하고 부른 노래가 바로 이곡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이혼당한 나도. 우리는 미래가 없었다. 맨해튼 17층에 있는 잭 리 스튜디오에서 황혼의 빛이 광장으로 전 뉴욕 시에 번질 때, 그녀는 울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 핏줄(blood)

모스크바

추운 거리 홀로 서서
그대의 따뜻한 품
의자에 앉힌 담요같이
별똥에 묻힌 나의 장화
권총의 쇠망치
눌리지 마오
오늘은 햇살의 마지막 날

1991년 모스크바에 갔을 대, 빅터 쵸이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 강력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KBS 김정태 PD를 통해 그를 한국에 알렸다.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터는 완벽한 미남이었고 반항아였다. 아파트 보일러실에서 석탄을 삽질하는 노동을 하면서 밴드 활동을 했다. 그의 음악은 페레스트로이카 자유를 외치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0년 28살의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KGB? 의문이 많다. 전 러시아 젊은이들이 크리스커(고려인) 가수 빅토르 쵸이를 추모했다. 그래서 나도 그의 곡을 불렀다. 남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은 나로선 처음이다.

◆ To Oxana(Oh My Love)

옥사나

내 사랑 새벽이 오면 오겠지
내 사랑 가을이 오면 오겠지
없이는 몰라
없이는 폐허
없이는 시들어진 잎

I need you woman
I need you babe
I need you when the night has come

4년 동안 혼자 고독하게 살다 옥사나를 만났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굿모닝”하고 말하고 커피를 같이 마시고, 대화를 하니 황홀했다. 띵호아! 그래서 나는 “I love you”보다 더 극심한 “I need you”라며 그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양호야 양호야

한대수와 옥사나의 딸 양호

양호야 양호야 엄마 안 아프게 해주라
양호야 양호야 어서 빨리 얼굴 보자
이쁜 옷 블루진도 침대도 준비됐다
메르세데스 벤츠 애기차 신발도 세 켤레 있다
양호야 양호야 어서 빨리 나와라
양호야 양호야 Keep on cooking Keep on cooking

한 달 있으면 양호가 나온다. 겁이 났다. 양호를 갖기 전에 마누라가 알코올을 너무 마신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정상일지? 나는 Warrior(용사)가 아니고 Worrier(걱정쟁이)였다.

하지만 옥사나는 임신 10개월 중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하루 두 갑 쟁이 골초가 담배를 한 모금 안 피웠다. 양호는 3.5킬로그램의 예쁜 아기로 양호하게 태어났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은 옥사나에게 영원히 감사하다. 이 노래는 출산 전에 너무 걱정이 되어 작곡을 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도 준비돼 있고, 그랜드마트도 같이 가고, 비행기도 같이 날으고, 제발 엄마 안 아프게 태어나줘”하고 부탁하는 노래다.

◆ 한대수

한대수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국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실종돼 조부모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다. 미국 뉴햄프셔주립대학교 수의학과를 중퇴한 뒤 뉴욕 인스티튜드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했다. 1974년 1집 ‘멀고 먼-길’ 1975년 2집 ‘고무신’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는 자유를 갈망하던 당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체제전복적 음악’으로 분류돼 모든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15장의 정규 앨범과 여러 싱글 앨범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데뷔 40주년을 기념해`Rebirth` 앨범을 냈다.

-동영상: 한대수 40주년 기념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합창
-관련기사: 조선일보 2015년 3월11일 '하루 아침'에 모였다, 예순일곱 할배 위해

수 차례 사진전을 연 사진가이며,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등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제1회 한국가요제 10대 작곡상(1974) 국제시인협회 Editor’s Award(1997), KBS 가요대상 공로상(2003), 부산국제락페스티벌 공로상(2004),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2005)을 받았다.

2014년에는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의 한국싱어송라이터 명예의전당 첫 번째 헌액자로 선정됐다. 현재 신촌에서 두 번째 부인 옥사나와 딸 양호와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