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환자가 150명이 넘으면 진료비를 절반만 받을 수 있습니다. 환자와 건강보험 부담금이 1만 5000원이라면 7500원만 받는 셈입니다.

서울 관악구에서 이비인후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원장은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에 진료를 열심히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20년 전인 1995년 대학병원을 그만 두고 개인의원을 열었다. 집을 담보로 2억원 넘게 대출받고 필요한 의료장비를 사서 700세대의 새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임대를 얻었다.

근처에 내과나 소아청소년과가 없어 환절기 때마다 아파트 거주자와 인근 주택의 감기 환자가 몰려 들었다. 김 원장은 생각보다 환자들이 늘어나자 신이 났다. 진료실에서 김밥으로 때우고 점심시간까지 쪼개 진료를 했다. 오후 7시 병원 마감 시간이 지나서 몰려드는 직장인 환자도 기꺼이 받았다.

김 원장의 친절함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1990년 후반 하루 환자가 200명까지 늘었다. 김 원장은 10시간동안 쉬지 못하고 꼬박 진료를 하면서도 자신을 믿고 찾는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하지만 2001년 7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정부가 환자수에 따라 진료비를 줄이는 ‘차등수가제’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하루에 너무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 진료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도입 근거였다. 제대로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는 하루 최대 환자는 75명이다.

75명이 넘으면 진료비의 10%가 깎이고 101명부터 150명까지는 25%를 적게 받게 됐다. 환자 151명부터는 진료비 수익이 절반으로 줄었다.

정부는 당초 건강보험 재정이 부족하다며 차등수가제를 한시적으로 운영한다는 입장이었다. 2000년 시행된 의약분업 이후 병원과 약국에 건강보험 지원이 늘면서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을 보충할 때까지만 지속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시적이라는 조건과 달리 1년, 2년이 지나도록 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김 원장의 진료수익은 30%가 줄었다. 이후 같은 아파트 단지에 경쟁 병원들이 생기면서 환자수도 급속히 줄었다. 일부 의사들은 진료에 대한 열의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의료단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차등수가제로 사라진 진료비는 연간 600억원으로 추산된다. 김 원장을 포함한 개인의원 원장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국가권익위원회에 건의를 해봤지만 제도가 계속 유지됐다.

김 원장은 “정부가 개인사업자에 손님이 75명이 넘으면 강제로 세금 10%를 더 부과하고 150명이 넘으면 50%의 세금을 임의로 물리는 것과 같다”며 “민간을 상대로 세금을 강탈하는 행위”라고 토로했다.

보건복지부는 환자수에 따라 진료비가 달라지는 의원급 의료기관의 차등수가제를 14년만에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복지부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박윤옥 의원(새누리당)이 불합리한 차등수가제의 폐지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제기한 이후 의료공급자와 수요자간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환자가 많다는 이유로 진료비를 깎는 것은 부당하다”며 “환자가 많이 몰리고 실력있는 의사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과도한 규제인 차등수가제는 무조건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료수요자인 시민사회단체가 반대하고 있어 당장 폐지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환자가 많은 병원은 충분한 진료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우려에서다.

보건의료 시민사회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차등수가제 폐지가 아니라 재정비가 필요하다"며 "차등수가제 적용 대상을 의원 외에도 병원까지 확대해 진료량을 통제하고 적절한 진료시간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리 복지부 보험정책과 사무관은 “당장 폐지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차등수가제의 여러가지 개선안이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했다”며 “올해 안에 개선안이 마련될 수 있도록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듣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