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브라질 상파울루 동부에 있는 상카에타누두술의 작은 마을. 나는 4남 3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은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7남매를 키웠다. 집안 형편은 늘 빠듯했다. 가난은 우리 가족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

나는 열살 때부터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학창 시절 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했다. 한국식 표현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그 시절 날 버티게 해준 것은 '축구'였다. 공을 차며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일찍부터 철이 들었던 난 부모님에게 축구공이나 축구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대신 노끈을 둘둘 말아 단단히 엮어 실뭉치공을 만들어 맨발로 밤늦게까지 축구를 했다. 당시 내가 가진 큰 목표는 매일 실뭉치공을 발로 차며 유명 축구 선수의 기술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룰 때마다 나는 성취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성장해갔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계속된 나의 맨발 축구는 "얘야, 그만하고 돌아오렴"이라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들린 후에야 끝났다.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기업홍보센터에서 자사 브랜드 쉐보레가 후원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고 축구공을 차고 있다. ‘축구광(狂)’으로 유명한 호샤 사장은 “가난하던 어린 시절 맨발로 실뭉치공을 차며 미래를 꿈꿨다”며 “당시 어머니가 강조하신 ‘성실함’이 내 삶의 가장 큰 무기”라고 했다.

그 당시 내 주위에는 좋은 축구화와 축구공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나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위로하셨다. "네게는 비싼 축구화나 공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단다.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란다."

나는 어머니 말씀처럼 강력한 나만의 무기를 이용해보기로 결심했다. 부모님 가게 일이 끝나면 나는 골목길에서 맨발이 부르트고 까지도록 공을 차고 달렸다. '주변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성실함 하나를 무기로 공만 보고 달리자.'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주변에서 내 축구 실력을 따라올 자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어머니의 말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이 말은 나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자 인생철학이 됐다.

학창 시절의 꿈은 버스 운전사였다. 커다란 버스만 있으면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5세 때 한 자동차회사에서 3년간 견습생으로 일하며 자동차를 알게 됐다. 나는 차량 외관 모델링을 배웠고, 그 후 2년간 같은 회사의 차량 외관 디자인실에서 연습생으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그렇게 자동차와의 인연이 시작됐고, 축구 선수가 경기 중 축구공에서 눈을 떼지 않듯, 나 역시 자동차에서 한순간도 멀어진 적이 없었다.

이렇듯 축구·자동차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는 스무 살이 되던 1979년 GM 브라질 본사 엔지니어링부에 입사했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출근 첫날 나는 '전 세계에 내가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엔지니어링 한 자동차를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브라질에 이어 독일, 아르헨티나, 미국 등 전 세계를 돌며 약 22년간 일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근무하면서 날 도와준 것은 '축구', 버티게 해준 것은 '성실함'이었다.

2012년 3월 한국GM의 사장이 되고 나서 나는 직원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축구'다.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동료의 도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는 축구를 같이하면서 화합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부임한 지 2개월쯤 됐을 때 노사 축구 친선경기를 주최했다. 나는 사측 대표 선수로 출전해 현란한 드리블, 패스를 선보였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당시 의지가 너무 앞선 탓인지 다리가 꼬여서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해 6주간 다리에 깁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영광의 상처라며 자랑하고 다녔다.

나는 직원 가족과 만나는 자리도 만들었다. 직원 가족들이 한국GM에 대해 알게 되고 사무실을 방문함으로써 그들 역시 한국GM의 가족이 되길 바랐다.

직원들의 자녀를 만날 때면 나는 어린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좋아하고, 축구공 하나면 열댓 명의 아이가 순식간에 뭉치기도 하던 그 시절. 이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 직원들의 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 나에게 성실함을 나만의 무기로 만들 수 있게 해준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국적이 다르더라도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이런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말도 잘 안 통하고 피부색도 다른 내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직원들이 이제는 함께 막걸리를 먹자며 팀 회식에 초청하고, 결혼을 했다며 신혼여행 다녀온 사진을 보여주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셀카봉을 들이대며 함께 사진을 찍자며 팔짱을 끼기도 한다. 살갑게 다가오는 직원들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곤 한다. 또 모든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이 중심이며 회사가 직원들을 진정으로 대하면 직원들이 비즈니스의 성공을 이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세르지오 호샤 사장은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은 1979년 스무 살의 나이로 제너럴모터스(GM) 브라질에 입사한 후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GM맨’이다.

브라질 브라스 쿠바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주로 제품 개발 분야에서 일했다. 1993년 독일 오펠(GM 자회사) 국제기술개발센터에서 일했고 1996년에는 GM아르헨티나 로사리오 공장에서 프로젝트 제품 개발·기획 책임을 맡았다. 이후 GM 남미·아프리카·중동 지역 소형차 개발 총괄 임원으로도 일했다.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6년 한국GM의 전신(前身)인 GM대우에서 제품 기획·프로그램 관리 총괄 부사장을 맡아 2년 반 동안 일했다. 브라질로 귀국했다가 2012년 3월 한국GM 사장 겸 CEO로 복귀했다.

호샤 사장은 친근한 인상처럼 직원들과의 소통을 즐긴다. 매일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직원들과 같이 먹고 매월 1~2번은 임·직원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 채팅방을 연다. 국내 공식 행사에서나 고객이나 기자들을 만날 때 “안녕하세요. 호샤입니다”라며 먼저 한국말 인사(人事)를 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