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짝으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임진왜란을 말한 사람들은 흔히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한 쌍으로 묶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시발점이 된 선조, 전쟁이 터지자 국민을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 무책임한 국왕 선조를 왜 연재의 맨 처음에 거론하는가 하는 것 역시 그러하겠다. 선조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이렇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에는 선조가 잊혀지고 '성웅' 이순신이 조선의 대표주자로 거론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최고 통수권자는 엄연히 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조선·일본·명나라 삼국을 통틀어 비교할 대상이 없는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최전방에서 싸운 장군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장군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 그는 형식상 덴노(天皇)의 다음 가는 정치인이었으며, 호리 신(堀新) 교수의 표현을 빌면 실제로는 '중화(中華) 황제'를 꿈꾸는 '일본 국왕'이었다. 이처럼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일 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한 쌍으로 묶일 이유가 없다.

이순신과 한 쌍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그 후 일본 역사에서 신격화되기에 이르는 가토 기요마사가 되어야 한다.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는 매우 나쁘기 때문에, 이순신과 가토 기요마사를 한 쌍으로 묶는데 대해 반감 내지는 의구심을 품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를 다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임진왜란의 이미지에서 전쟁 당시 조일 양국의 국가 체제나 개개인의 역할 분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가 언급되는 경우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필자 역시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행적을 긍정적인 것으로서 재평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의 다른 책인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서 상세히 검토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은 조선이 대비를 잘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성격의 전쟁이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해안이라는 지정학적 주변부에 자리한 한반도가, 일본이라는 해양 세력이 대두하면서 지정학적 요충지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이 무능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협소한 해석이거나, 조선의 행동 여부에 따라 세계사적 흐름이 바뀔 수 있었다는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구리 동구릉에 자리한 선조 목릉의 정자각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일방적으로 임진왜란 발발의 책임을 묻는 것 역시, 이러한 국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혐의가 있다. 이한우 선생은 '선조 - 조선의 난세를 넘다'라는 책의 머릿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국의 제왕과 소국의 제왕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대국의 제왕은 영토를 넓히는 데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반면 소국의 제왕은 물려받은 영토를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점수를 받아야 한다. 대국은 정복을 감행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소국은 늘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지정학적 위상과 국력이 변화한 21세기의 한반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하겠다.

아뭏든,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왕조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국왕 선조가 '상당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이한우 선생의 평가에 대해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명나라로 망명을 하려 했고, 명나라가 국왕을 교체하라는 압력을 넣었고, 유력한 왕세자인 광해군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선조는 결국 국왕 자리를 지켰다. 나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해은 선생이 상세히 검토한 바와 같이 선조는 광해군에 이어 즉위한 인조대에 이르러 국가 중흥의 국왕으로 재평가받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선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군(聖君)은 아니되 노련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마키아벨리적 군주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그 행적이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닌 인물들의 공통점을 무리하게 찾아낼 생각은 없지만, 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사람에게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는 노련한 정치가라는 공통성이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이 두 사람의 이러한 정치가적 자질은, 애초에 최고 통수권자가 될 자격이 없었던 이들 두 사람이 스스로의 실력과 행운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획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정 상태를 유지하던 조선의 여러 왕자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선조는 처음에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전(前) 국왕 명종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세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자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핏줄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국왕 즉위였기에, 선조는 정치적 생존감각과 부단한 노력으로 스스로 “왕다움”을 증명해야 했다.

국왕이고자 한 그의 노력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조선 전기의 훈구세력을 피흘려가며 축출한 신진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 것을 선조는 막을 수 없었다. 붕당 정치의 탄생은 선조의 탓이 아니었지만, 그의 치세 중에 시작된 붕당 정치는 그의 사후에 광해군에게 불안정한 정권을 물려주었고, 결국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이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는 일본에서 100년 간의 전쟁이 끝나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일본은 비록 전쟁으로 점철되기는 했지만, 긴 전쟁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의 통일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결과 일본 국내가 분열되고, 그 혼란 속에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 했던 일본 서쪽의 주민들은 바다 건너 조선과 명나라를 약탈하는 데에서 방도를 모색했다. 중세 북유럽의 대분열 시기에 게르만인들이 바다 건너 유럽 전역을 약탈 대상으로 삼고 노르망디 공국, 시칠리아 공국 등의 영토를 획득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비록 일본의 왜구는 조선과 명나라에서 항구적인 영토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두 나라 정부가 해안 지역에서 주민들을 소개(疏開)하고 오늘날의 부산·진해·울산 등지에 임시적인 교역 거점을 내주는 등 왜구의 활동은 바이킹에 비견될 정도로 위협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혼란의 근원에 무로마치 막부의 무능이 있었다.

이처럼 무력한 막부와 형식적인 덴노 궁정을 대신하여 일본의 분열을 끝내려 한 것이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야심적인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수 천명 단위의 학살도 꺼려하지 않았으며, 그 이전 시기의 장군들과는 달리 일본 통일과 전국적인 지배권의 획득을 꿈꾸었다. 이런 맥락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본 열도가 서서히 안정기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젊은 시절 이름인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적혀 있다. (1797년 간행 “에혼 다이코기” 1편 권1. 김시덕 소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떤 문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월한 핏줄이 아니면 일본을 지배할 수 없다는 주장이 '진리'로 믿어지던 전근대 일본에서 그가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력과 행운이 모두 작용했다. 까다로운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능력이 점차 부각되던 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었다는 행운도 따랐다.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이 시점에 살해되지 않고 장수했다면, 또는 오다 노부나가가 살해된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먼저 교토로 달려와 주군의 복수를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또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이 유능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통수권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터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100년간의 분열 시기에서 비롯된 정권 내의 당쟁에 대해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당파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당파는 임진왜란을 통해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 당파의 대립을 이용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제거하고 일본을 차지하게 된다. 당파 싸움이 정권을 불안정하게 하고 결국 무너뜨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다음 회에는 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중 행적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