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병 치료의 성배(聖杯)인가, 유전자 차별 사회의 전조(前兆)인가. 전 세계 생명과학계가 인간의 유전정보가 들어있는 DNA를 자르고 편집하는 기술을 두고 논란에 빠져들었다. 지난 13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크리스퍼(CRISPR-Cas9)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생식세포 DNA의 교정을 중단하자"고 발표했다. 연구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이다. 일주일 뒤 네이처와 세계 과학학술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사이언스'지에도 같은 주장을 담은 글이 실렸다. 여기에도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서명했다. 도대체 과학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세균에서 찾아낸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는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의 영문 약자로, 세균에서 염기서열이 짧게 반복되는 DNA 조각을 뜻한다. 1980년대 일본 오사카대 연구진이 그 존재를 찾아냈고, 2007년 유가공회사에 유산균을 공급하던 회사가 그 역할을 알아냈다. 바로 세균이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유전자 백신이었다. 세균은 한번 감염됐던 바이러스의 정보를 자신의 DNA 조각에 저장한다. 다시 그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이 DNA 조각이 달려가 결합한다. 이를 신호로 세균의 면역체계가 작동해 바이러스를 공격한다. 크리스퍼는 일종의 '바이러스 전과기록'인 셈이다.

2013년 초 서울대 김진수 교수와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 등 5개 그룹이 거의 동시에 크리스퍼의 작동 원리를 응용해 DNA를 자유자재로 잘라내고 새로운 DNA를 붙이는 유전자 가위를 개발했다.

DNA는 지퍼처럼 두 가닥이 맞물려 있다. 먼저 잘라내고 싶은 DNA에 결합할 RNA를 만든다. RNA는 DNA의 유전정보를 복사해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유전물질이다. 세균이 크리스퍼로 바이러스를 포착하듯 RNA는 잘라낼 DNA를 찾아 결합한다. 이제 DNA라는 지퍼가 풀리고 한쪽에 RNA라는 다른 지퍼가 결합된 모양새가 된다. RNA에는 'Cas9'라는 효소가 달라붙어 있다. 효소는 RNA와 DNA가 결합한 부분을 잘라낸다.

효소가 DNA를 잘라내면 그 부분에서 새로운 DNA가 만들어진다. 헌 철도 레일을 걷어내고 흠집 없는 새 레일을 끼우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이런 방식을 활용하면 돌연변이가 일어난 유전자를 잘라내고 문제가 없는 정상 유전자로 대체할 수 있다. DNA 재생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잘린 부분에 딱 맞는 DNA 조각을 만들어 넣어주면 바로 끼어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특정 유전자를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

맞춤형 아기 우려 나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전자 연구 도구 중 가장 정확하고 사용하기가 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진수 교수는 "2년 전 불과 5개 그룹만 쓰던 것이 이제는 분자생물학을 하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쓰는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나쁜 사람 손에 가면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면 유전자 차별 사회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돈 있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자식의 지능과 외모 유전자를 좋게 바꾸고, 가난한 사람들은 태어난 그대로의 유전자로 차별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징후는 이미 나타났다. 작년 중국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원숭이의 배아에서 특정 유전자를 바꿨다. 나중에 태어난 새끼 원숭이에서는 그 DNA가 바뀌어 있었다. 이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정자나 난자의 DNA를 손봐서 원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대부분 국가가 후대로 유전될 수 있는 생식세포의 유전자 변형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미국과 중국에서는 기초연구 차원에서 사람의 생식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적용한 연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자들이 모라토리엄 선언까지 하고 나선 것은 한번 생식세포 연구가 시작되면 시험관 아기에게 적용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에이즈 근원 치료법으로도 연구 중

물론 과학계에서는 극단적인 연구 중단보다는 안전성 이슈가 해결될 때까지만 연구를 자제하자는 의견이 다수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효용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발표문에 서명한 하버드 의대의 조지 처지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배아 등 생식세포 DNA를 조작하는 일을 막는 수단이 필요하다"면서도 모라토리엄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이전에도 DNA의 기능을 조절하거나 잘라내는 기술들이 있었다. 인체에 무해한 바이러스의 유전자에 특정 DNA를 붙여 사람에게 주사하면 바이러스가 사람 세포에 감염되면서 해당 DNA도 사람 DNA에 끼어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어느 세포에 갈지는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DNA를 실은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인체에 주입하는 융단폭격을 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와 원리는 같은데, 단백질을 RNA 대신 목표가 되는 DNA에 달라붙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단백질은 RNA보다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 조작과 관련해 개발된 어떤 방법보다도 간편하고 정확하다. 과거 유전자 하나를 잘라내고 새로 바꾸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씩 걸리던 것이 이제는 며칠이면 된다. 한 번에 여러 군데의 유전자를 동시에 손 볼 수도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다양한 곳에 이용되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혈액 세포의 DNA를 바꾸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크리스퍼를 이용한 세균의 면역반응을 모방해 새로운 항생제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농업도 혜택을 볼 수 있다.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한 우려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병충해에 강한 GMO 콩은 식물에 동물 유전자를 집어넣은 것이어서 생태계 혼란에 대한 우려가 많다. 하지만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식물에서 약한 유전자를 잘라내고 스스로 강한 유전자를 복원하도록 하면 그런 문제가 없는 신품종을 만들 수 있다.

[IFpedia→]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인간이나 동·식물의 세포에서 특정 유전자가 있는 DNA를 잘라내는 효소. 교정을 하려는 DNA를 찾아내는 가이드 RNA와 DNA를 잘라내는 Cas9 단백질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