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루스 지음|이유영 옮김|부키|416쪽|1만4800원

“뉴욕 맨해튼 중심가 월세가 얼만 줄 아세요? 저렴한 원룸이 2000~3000달러(한국 돈으로 225만~338만원) 정도예요. 거기 사는 친구들은 내로라하는 월가 금융회사에 다니는데 연봉이 우리 돈으로 1억원이 훌쩍 넘죠. 그래야 월세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같이 키 크고 스펙도 좋은 친구들인데 여자친구가 없어요. 만날 시간이 없거든요.”

작년 10월 미국 유수 대학을 나와 뉴욕에서 직장을 다니는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월가에서 함께 근무하는 친구들 이야기였다. “일부 여자들이 팔자 고쳐보겠다고 한낮에 맨해튼 중심가를 어슬렁거리는데 잘못된 전략이에요. 그 시간에 그 친구들은 한가하게 돌아다닐 시간이 없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그때 그 지인과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저자는 뉴욕타임스(NYT) 출신 기자다. 2년 동안 월가의 1년차 애널리스트 8명을 취재해 그곳의 일상을 세밀하게 드러낸 책이다.

월가 루키들의 공식적인 근무 시간은 ‘9 to 5’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 아니다. 오전 9시 출근해서 그 다음날 오전 5시까지 근무한다. 주당 10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업무를 감당하면 연봉 15만달러(약 1억7000만원)가 주어진다. ‘월가 금융맨’ ‘억대 연봉자’라는 자부심이나 우월감은 덤이다.

그들이 말하는 일상은 겉보기와 달리 화려하지 않다. 저자는 이렇게 전한다. “그들의 사무실에는 냄새 나는 배달음식 그릇과 겨드랑이가 더러워진 셔츠들이 나뒹군다. 지난주에 찾은 세탁물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을 아무렇게나 꺼내 입는 그들은 두 달 동안 햇볕을 쬔 적이 없다. 고객들이 읽을 리 없는 피치북(영업담당 직원들이 회사 제품을 팔 때 회사 주요 속성을 나열해 소개하는 것)을 만들다 보면 엑셀 스프레드시트의 셀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함이 돌아온다. 이 모든 게 뉴욕 지하철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제지하는 연말 보너스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다. 새내기 월가 금융인들은 이렇게 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잠을 좀 더 자는 것이다.”

그들은 이성친구를 만날 시간도, 이성친구와 관계를 유지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한 웰스파고 애널리스트는 바쁜 업무 때문에 데이트 직전 번번이 약속을 깨다가 정작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만다. 씨티그룹에 근무하는 한 애널리스트는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자기면역질환에 걸린다. 다른 인물들의 삶 역시 피폐해져 가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출근하다가 차에 치이면 얼마나 오래 쉴 수 있을까 궁리한다는 말까지 나올까.

하지만 월가 신참들의 고백은 어떤 면에서 배부른 투정으로 들린다. 취재대상이 된 8명은 물론 월가 신입사원들은 다른 업계 또래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남은 생애를 남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아이비리그에서 월가 입성을 목표로 공부해 온 엘리트이고, 그에 준하는 대우, 연봉수준에 합당한 일을 맡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입사 후 2년 뒤 성과에 따라 짐을 싸야 하는 고급 비정규직 처지이고, 실제 회사를 떠난다 해도 그들의 앞길을 동정하기 어렵다. ‘직장 하나를 골라 2년 동안 등이 휘어지도록 일하고 난 뒤 헤지펀드나 사모투자업계로 옮겨 2년 더 숫자에 미쳐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4년 남짓 보내고 나서 경영대학원(MBA)을 거친 뒤 다시 헤지펀드나 사모투자업계로 돌아가 승진 사다리를 탄다.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12만달러였던 급여가 18만달러로, 그 후에는 다시 40만달러로 올랐다.’ 잠시 짐을 싼다고 해도 앞길은 탄탄대로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7년이 흘렀고 그 해 9월을 기점으로 월가를 호령하던 애널리스트들은 직업을 잃고 거리로 쫓겨났다. 보너스는 줄고 고용안정성은 바닥을 쳤다. 월가 지형이 송두리째 바뀐 듯 보였다.

정말 변했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여전히 많은 고급 인력들이 월가 입성을 꿈꾸며, 그곳에서 강도 높은 업무를 감당하고 분투한다. 1년차 보너스로 세후 2만달러(약 2300만원)를 받고도 치욕스럽다는 투정을 감당해낼 독자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