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준 교수는 반도체칩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힌다. 유 교수는 “소형화 추세인 각종 전자기기의 배터리 수명은 결국 우수한 반도체칩 설계에 달렸다”고 말한다. / 대전=전준범 기자

많은 비가 쏟아진 이달 18일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KAIST) 캠퍼스. 장대비를 뚫고 전기 및 전자공학동 1층에 들어섰다. 연구실 문을 열자 중년 남성이 “어서 오라”며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선 호기심 많은 소년 같은 미소가 묻어났다.

이날 찾은 유회준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의 연구실은 좁지는 않았지만 책과 온갖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각종 학회 참석과 강의, 연구, 미팅이 스케줄표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연구와 투자자 물색 등 여러 일정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그의 요즘 생활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유 교수는 이달 9일 저전력 스마트안경인 ‘케이글래스2’를 공개했다. 구글글래스가 음성인식 방식이라면, 케이글래스2는 적외선이 동공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2월 첫 선을 보인 후 성능과 디자인을 향상시켜 이번에 다시 내놓았다.

학생 한 명이 안경을 쓰고 눈을 깜박이자 안경 안쪽에 달린 적외선 센서 3개가 동공을 인식했다. 눈을 좌우로 움직이자 센서 빛도 동공을 따라 움직였다. 한쪽 눈을 살짝 감는 윙크를 하면 컴퓨터 자판의 ‘엔터키’ 기능을 한다. 코 받침대에 내장된 센서는 콧등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 눈 깜박임과 윙크를 구별한다.

유 교수는 “연구실에서 제작한 스마트 안경이라 구글글래스보다 크기도 크고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다”며 “그러나 구글이 따라올 수 없는 ‘반도체칩’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 교수는 반도체칩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통한다. 지난해 2월부터 1년간 이 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C)에서 아시아 대학 교수 최초로 학술위원장을 맡았다.

유 교수는 인터뷰 내내 반도체칩 연구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했다. 그의 연구실 벽에 반도체칩 회로도가 잔뜩 걸려 있었다.

-케이글래스를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스마트 기기가 늘면서 핵심인 반도체칩 성능이 관건이 됐습니다. 작고 가벼우면서 오랫동안 쓸 수 있으려면 전기를 적게 소비하면서 계산 성능이 뛰어난 반도체칩이 필요합니다. 특히 여러가지 스마트기기 가운데 스마트안경이 이를 실증할 최고의 제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마트폰도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나온 다음에야 히트를 친 셈입니다.”

-케이글래스에는 어떤 기술이 들어갔나?

“사람의 뇌는 적은 전력을 쓰면서도 많은 일을 해요. 이 메커니즘을 연구해 ‘뇌 모방 프로세서’를 개발했습니다. 지난해 2월 ISSCC에서 발표했는데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케이글래스에도 이 프로세서가 들어갔습니다. 구글 글래스처럼 기업이 만든 세련된 겉모습은 아니어도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전력 측면에서는 소프트웨어가 반도체칩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저전력이면 배터리 성능이 오래 갑니다.”

-소프트웨어보다 반도체칩을 많이 강조하는데.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중앙처리장치(CPU)가 소프트웨어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면 전기를 많이 소비하게 됩니다. 스마트안경을 10분마다 벗어서 충전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가진 반도체칩을 만들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납니다. 디자인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얼마든지 세련되게 바꿀 수 있습니다. 반도체칩은 웨어러블 기술 가운데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분야입니다.”

“퀄컴은 인텔이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등장했습니다. 만드는 것보다도, 설계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갖고 있었어요. 현재 퀄컴의 시가총액은 인텔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습니다. 핵심 칩을 먼저 보유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앞으로 스마트안경 시장이 성장하면 스마트폰처럼 전용 AP를 누가 만드냐의 싸움도 분명 시작될 것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곳에서 비슷한 연구를 많이 하지 않나?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도 예전에는 반도체 관련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반도체를 만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요즘은 투자를 잘 안 합니다. 대부분 소프트웨어를 합니다. 이곳의 소프트웨어 경쟁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한국이 실리콘밸리와 싸워 이길 방법은 반도체칩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어요. 저전력을 구현하려면 우수한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유 교수팀이 개발한 케이글래스2를 쓰고 책 겉표지를 바라보자 화면에 해당 책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 모니터 외쪽 상단을 보면, 적외선 센서(빨간색 원)가 동공을 추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전=전준범 기자

-저전력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스마트폰에 노트북 배터리를 넣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마트안경에 스마트폰 배터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배터리 크기는 점점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점점 더 우수한 성능을 요구합니다. 스마트안경에는 컴퓨터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를 결합한 증강현실 기능도 넣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스마트안경에 최적화된 전용 AP를 만든 것입니다. 요즘은 소프트웨어만 강조하는 분위기인데, 시스템도 중요합니다. 하드웨어는 일단 잘 구축해두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유 교수는 케이글래스2를 공개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모바일 기반의 헬스케어 시스템도 개발해 발표한 바 있다. 이 연구 역시 반도체칩 기술이 적용됐다. 특히 유 교수가 10년 넘게 연구한 ‘웨어러블(wearable)’ 기술이 투입됐다. 유 교수는 10여년 전부터 유연한 옷감 위에 인쇄회로를 새기는 연구를 해왔다.

-최근 모바일 헬스케어 통합 플랫폼인 ‘닥터엠(Dr M)’을 개발했다.

“닥터엠은 인체에 부착한 스마트 센서를 통해 생체신호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통합 모바일 헬스케어 시스템입니다. 오래 전부터 인쇄회로를 직물 위에 새기는 연구를 했습니다. 웨어러블 연구를 일찍부터 시작한 셈입니다. 그동안 심전도 측정기기를 만들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자꾸 간만 보고 실제로 사가진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이 아예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게 2년 전입니다. 상용화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최근에는 외국 기업과도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벨트 형태로 된 허파 측정기기도 개발했습니다. 벨트를 두르면 허파의 크기나 상태를 체크해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반창고처럼 생긴, 얼굴에 붙이는 휴대용 수면 측정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얻은 결과물들을 헬스케어에 도입한 게 닥터 엠이라고 보면 됩니다. “

-웨어러블 연구에 착수하게 된 배경은?

“웨어러블 기기는 1995년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입니다. 당시에는 큰 컴퓨터를 분해해서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고 연결하는 개념이었습니다. 미디어랩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가는 구리선을 꼬아서 옷에 자수를 놓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이후 이 연구가 유럽, 아시아 등으로 확산됐습니다. 우리도 이때부터 연구에 착수해 인쇄회로를 직물에 새기는 데 성공했고 특허도 받았습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가 이 분야를 주도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유 교수는 최근 인체에 부착한 스마트 센서를 통해 생체신호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통합 모바일 헬스케어 시스템인 ‘닥터 엠’을 개발했다. 사진은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동 2층에 마련된 닥터 엠 쇼룸의 모습. / 전준범 기자

유 교수는 연구 외에도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태권 로봇’ 대회로 알려진 ‘지능형 시스템온칩(SoC) 로봇워 대회’다. 유 교수는 이 대회의 운영위원장이다.

-매년 열고 있는 지능형 SoC 로봇워 대회는 어떤 행사인가?

“이 행사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변 확대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반도체를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이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로봇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럴 듯한 로봇은 엄청 많고 만드는 사람도 넘치는데, 정작 로봇의 보드를 설계하고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로봇을 뜯어보면 노트북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어요. 하드웨어가 아닌 죄다 소프트웨어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능형 SoC 로봇워 대회는 참가자들이 보드를 직접 설계하고 만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로봇들이 겨루기를 합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100개 이상의 로봇 관련 대회 가운데 난이도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합니다. 모든 제품의 근간에는 반도체칩이 있습니다.”

-그동안 개발한 웨어러블 헬스케어기기, 케이글래스를 보면 일찍부터 상용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같다.

“항상 10년 후에 뭐가 될 지를 고민하는 편입니다. 무엇인가를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후 반드시 될 것 같은 걸 만듭니다. 15년 전쯤 내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게임에 최적화된 칩을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휴대폰으로는 전화와 문자만 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웨어러블의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 때도 10년 전입니다.”

-웨어러블 기기가 뜨고 있는데 투자는 많이 받았나.

“너무 앞서 있었던 탓인지 연구비는 못 받았습니다. 당시에도 믿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된 연구비를 지원 받지 못했습니다. 투자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10년 후를 믿고 현재 투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

“늘 미국이나 일본을 능가하자고 하면서, 막상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그 나라들(미국과 일본)이 한 적 있냐고 물어봅니다. 능가하려면 아무도 안 한 걸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도 안 한 일이면 실패 가능성부터 거론합니다. 이율배반적입니다.”

▲유 교수는 직물 위에 인쇄회로를 새기는 데 성공했다. 모습은 투박해 보여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 전준범 기자

-외국에서는 어떤가.

“사실 오늘 아침에 지도학생 한 명이 퀄컴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일본 니케이 신문은 지도학생에게 자신들이 포럼을 개최하는데 와서 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ISSCC에 논문을 40편 이상 냈는데 이중 지난해에 낸 게 5편입니다. 지난달부터 후임으로 학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케빈 장 인텔 부사장이 “남들이 ISSCC에 평생 동안 제출하는 논문 수를 한 해에 다 냈다”고 질투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말하면 그게 되겠냐고 의심부터 받는 것들입니다.”

-혁신을 외치는 국내 대기업들도 보수적인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은 임원들의 생존 기간이 짧다보니 도전을 안 하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오너가 강하게 밀어 붙이지 않으면 모험이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또 결정권을 가진 오너는 나이든 경우가 많아 혁신연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11월 경암교육문화재단에서 주는 상을 받았는데 이때 수상 소감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항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자세로 연구한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유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영혼까지 고스란히 바치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갈구하고 노력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구에 열심히 매진할 생각”이라고 했다.


유회준 교수
1983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8년 카이스트(KAIST) 공학박사
1988~1990년 미국 벨사 박사후연구원
1999~1995년 현대전자 반도체연구소 DRAM 설계실장
1998년~현재 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교수
2003~2005년 정보통신부 IT SoC/차세대 PC 전문위원
2001~2007년 KAIST SIPAC(반도체설계자산연구센터) 소장
2007~현재 KAIST SDIA(반도체시스템설계응용연구센터)소장
2009~2011년 한국 차세대컴퓨팅학회장
2009~현재 삼성 미래기술연구회 운영위원
2009~현재 IEEE 펠로우
2014년~현재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C) 학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