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대한 무지(無知)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악의 선택'을 내리게 만든다. 본지가 심층 인터뷰한 신용불량자들은 하나같이 "잘 몰라서" "별생각 없이" "속아서" 그런 선택을 내렸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참혹했다.

빚으로 부은 적금

이정희(30·가명)씨는 적금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껴두고 카드빚으로 생활하다 20대를 날려버렸다. 22세였던 2007년,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자 어머니는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이씨 이름으로 매달 40만원짜리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세금을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은 80만원가량이었다. 적금을 붓고 남는 40만원으로는 통신비와 교통비 대기에도 빠듯했다. 부족한 용돈은 신용카드로 마련했다. 월급으로 카드 이용 대금 갚기가 버거워지자 현금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악순환에 접어든 것이다. 독촉장을 막는 생활을 1년쯤 이어가다 '목돈을 빌려 한 번에 빚을 갚겠다'고 생각하고 은행을 찾았을 땐 이미 신용 등급이 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사기꾼들이 귀신같이 알고 접근했다. 카드깡 사기와 대부업체의 꼬임에 넘어가 빚은 더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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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았던 20대를 돌이키며 이씨는 "무리하게 적금에 들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 적금만 깼더라도 카드빚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요즘은 어린 남동생에게 틈날 때마다 가르쳐요. '버는 만큼만 써야 한다, 신용카드는 빚이다, 돈은 무섭다' 같은 것들요. 제가 어렸을 땐,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요."

친구로부터 떠안은 마이너스 대출

임영규(33·가명)씨는 2010년 친구와 동업해 피자집을 차렸다. 임씨는 저축한 돈으로, 친구는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받아 각각 3000만원씩 창업비를 댔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됐다. 어느 날 친구가 피자집에서 손을 뗄 테니 대출을 대신 떠안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수익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임씨는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당시 20%대였던 마이너스 통장 대출 이자를 쉽게 본 게 결정적으로 화근이 됐다. "이자가 한 달에 20여만원씩 나가더라고요. 좀 밀리면 원금까지 불어나는 거예요. 여기다 임차료니 뭐니 내다 보니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벌게 됐고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졌어요."

결국 임씨는 2년 만에 장사를 포기했다. 임씨는 직장을 구해 월 130만원 정도를 벌지만, 아직도 대출 이자를 갚고 있다. 그는 "주위 어르신들이 고금리 대출은 위험하다고 말릴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며 "20%란 숫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다"고 했다.

인감도장 한 번 빌려준 게 파탄

양기원(60·가명)씨는 20년 전 친구에게 건넨 도장 하나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중견 제조업체 생산부장이었던 그는 친구가 "생활 자금이 필요하다"며 "농협에 아는 은행원이 있는데 직장이 확실한 네 이름으로 1000만원을 빌려 500만원씩 나눠 쓰자"고 했다. 마침 카드 이용 대금이 밀려 있던 양씨는 의심없이 친구에게 인감도장을 건넸다. "그런데 얘가 1000만원을 빼서 잠수를 해버린 거야. 은행 가서 따져도 도장 찍혀 있으니 어쩔 수 없대."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3개월 뒤부터 은행에서 체불 통지서가 마구 날아왔다. 알고 보니 친구가 양씨의 인감을 들고 대리인을 자처해 마구잡이로 대출받은 것이었다. 7개 금융사에서 빌린 빚 1억7000만원이 고스란히 양씨 앞으로 돌아왔다. 은행에 가서 따졌지만, 모든 서류가 완벽해 구제받을 길도 없었다. 원통한 생각에 양씨는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갚아야 하느냐"면서 깔아뭉갰다.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2년 만에 원금과 이자를 합쳐 갚아야 할 돈이 3억6000만원이 됐다.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양씨는 아내와 이혼하고 서울에 올라와 노숙인 생활을 시작했다.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다.

양씨는 현재 건강보조식품 판매일을 하면서 서울 영등포공원 근처의 30만원짜리 월세에 혼자 살고 있다. 양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친구를 믿어버린 내가 잘못이지. 도장 한 개로 인생이 이렇게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한탕을 노린 아파트 투자

2008년 시부모 두 분이 모두 암에 걸리며 병원비로 7000만원 빚이 쌓이자, 김혜영(39·가명)씨가 눈을 돌린 것은 아파트 투자였다. 2003년 4900만원에 샀던 파주의 아파트가 5년 만에 1억4000만원으로 껑충 뛰는 놀라운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설픈 경험이 독이 됐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빚을 청산한 뒤 은행에서 7500만원 대출을 받고 전세를 끼워 1억4500만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큰돈 벌려면 부동산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생각도 못했던 양도소득세가 1800만원이 나왔어요. 돈이 없어 현금서비스 받아서 냈죠. 거기다 무슨 공사비다 뭐다 돈 들어갈 데가 많은 거예요. 직업군인 남편 명의로 군인 대출도 받고, 보험에서 약관 대출 받다 보니 빚이 1억원이 넘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 위기와 미분양 사태가 터지며 아파트 가격이 폭락해 4년 만에 집값이 4000만원이나 떨어졌다. 대출이 많아 집을 팔려고 내놔도 팔리지도 않았다. 전세금을 내주느라 남편의 퇴직금까지 2000만원을 끌어써야 했다. 김씨는 "그때 집만 안 샀어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무리한 투자가 결국 빚만 남겼다"고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