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 A지점의 B차장은 동료들 사이에 '정 과장'이라 불린다. 본인은 자신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줄 모른다. 정 과장은 한 TV 예능 프로그램이 무역상사를 배경으로 만든 특집극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정 과장은 하는 일 없이 먹을 것만 밝히면서 월급만 축내는 고참 직원으로 묘사된다. A지점에서 일하는 3년차 직원은 "B차장이 하는 일이라곤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 퇴근하는 게 전부인데 월급은 내 월급의 2배가 넘는다"며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속이 터진다"고 했다.

'정 과장'은 A지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행별로 적게는 300여명에서 많게는 1000여명까지 승포자(승진을 포기한 채 정년만 채우자는 사람)를 자처하는 정 과장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은행원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지점장의 꿈을 버린 채, 부지점장이나 차장에 안주하면서 정년만 기다린다. 한 은행 인사 담당자는 "승진 포기자들을 보면 영업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많게는 1억5000만원의 연봉을 받아간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이런 직원을 구조조정하고 싶지만 정규직을 해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은행들은 궁여지책으로 갖가지 꼼수를 동원한다. 한 은행은 올해부터 본부장으로부터 1년에 2회 이상 경고를 받은 직원은 인사조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다른 은행은 휴가를 명목으로 오랜 기간 업무에서 배제하는 '힐링휴가'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또 다른 은행은 요주의 대상인 부지점장들을 실적 1위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워 개인별 통보를 한다.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협박도 해 가면서 정 과장들을 뛰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않고 있다. 십수년간 업무에 매진한 기억이 없는 사람을 뛰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은행 직원은 "지점장마다 인사철 때면 승진 포기자들을 받지 않기 위해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인다"며 "직원 입장에선 승진포기자들이 그저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정 과장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인사 적체로 지점장 달기가 하늘의 별이 돼 가면서, 일찌감치 지점장 승진의 꿈을 버리는 직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60세 정년 연장은 은행들에 재앙이 될 수 있다. 한 금융계 인사는 "중고참 직원이 주류를 이루는 항아리식 인력 구조는 각 은행이 안고 있는 최대 고민"이라며 "이런 인력 구조부터 바꿔야 금융개혁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