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의 생산기지다? 개발도상국은 생산 활동을 하고, 한국은 지식 노동을 해야 한다? 첨단 특허와 세계적 논문 한 편이 1만명을 먹여 살린다? 이런 말들은 모두 한국 산업 현실을 오도(誤導)하는 고정관념입니다."

산업 각 분야를 담당하는 서울대 공대 교수 25명을 심층 인터뷰한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이런 착각부터 버려야 한국 제조업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특허·논문·인력 등 산업 현장의 혁신에서 이미 한국을 넘어섰고, 생산 현장 없이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경험 지식은 쌓일 수 없으며, 실용화되지 않은 특허·논문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인데도 우리는 현실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4일 서울대 공대와 MIT(매사추세츠공대), 국민경제자문회의, 조선일보가 공동 개최한 '제조업의 미래' 포럼에서는 한국 제조업(製造業)의 미래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제언이 오갔다.

이날 포럼은 조선·자동차 등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온 제조업이 정체에 빠졌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한국 제조업의 비중(GDP 대비 30%)은 높은 편이지만, 생산 공장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저가(低價)의 생산기지로만 여겼던 중국은 이미 기술력에서도 턱밑까지 쫓아왔고, 일본은 엔저를 기회로 가격 경쟁력까지 회복했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은 "제조업은 국가 산업 경쟁력의 기반이자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천인데, 성장 전략을 찾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제조업은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참석자들이 꼽은 첫째 해결책은 '먼저 벤치마킹 단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의 장점을 빠르게 베껴 일정한 수준에 올랐지만, 세계시장을 이끌기 위한 혁신(革新)의 문턱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천정훈 MIT 교수는 "일본 기업들이 벤치마킹으로 성장해 1등이 됐지만 결국엔 경기침체에 빠지고 말았다"면서 "한국에서도 대기업은 물론 움직임이 유연한 중소·중견기업에서도 다양한 혁신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고부가가치의 해양플랜트, 장대교(長大橋·길고 큰 다리) 분야의 강국(强國) 같지만 현실은 '속 빈 강정'이란 지적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길이 21.38㎞의 국내 최장 사장교(斜張橋) 인천대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이 동원된 국내의 '랜드마크' 격인 다리다. 하지만 공정관리(영국)와 구조설계(일본) 등 핵심 분야는 모두 외국 기업의 몫이었다. 삼성물산 등 국내 업체들은 기술력이 부족해 전체 사업비(2조4000억원)의 절반 수준에 해당하는 시공(施工·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하는 것)만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대형 조선사들 역시 세계 해양플랜트의 31%를 수주하지만, 기획·설계 역량이 부족해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은 해외 엔지니어링 업체에 고스란히 내주고 있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제조업 부흥과 산업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선 경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험 지식은 매뉴얼을 만들듯 표준화하기는 어렵지만, 장인(匠人)이 대(代)를 이어 기술을 전수하듯 누적되는 고부가가치 기술을 뜻한다.

제조업을 폄하하는 사회적 인식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박홍재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지금 내 딸도 공대에 다니지만 과연 내가 딸을 생산 공장에 보낼 수 있을지는 고민"이라면서 "우수한 인재가 많이 유입될 수 있도록 제조업에 대한 사회적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과 경영을 모두 이해하는 공대 출신 CEO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린터가 문서를 찍어내듯 단시간에 3차원 입체 물품을 만들어내는 3D프린터 등 IT(정보기술)를 결합한 신(新)제조업도 해법으로 제시됐다. 1980년대 3D프린터를 공동 개발한 에마누엘 삭스(Sachs) MIT 교수는 "3D프린팅 기술이 30여년 지나서야 활성화됐듯 미래 기술 개발을 위해 장기적인 투자와 기술·지식재산권 보호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건우 학장은 "제조업의 미래를 모색하는 쉽지 않은 주제의 포럼임에도 일반인을 포함해 300여명이 자리를 꽉 채운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제조업 부흥을 위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