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촌에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지난 1~2월 떠들썩했다. 병원의 전신인 '제중원'(한국 최초 서양식 병원) 130주년을 맞아 병원 측이 "힘든 이웃을 돌아보자"며 직원들에게 '나눔의 종잣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1인당 5만원이었지만 다 합치면 3억930만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사용처를 정하는 건 직원들 자유였다. 뜻맞는 직원들끼리 합종연횡, 갖가지 나눔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어떤 직원들은 영등포역 노숙인들에게 한 끼 저녁을 대접했고, 다른 직원들은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학교와 요르단 난민 캠프에 의료·응급 구호물품을 전했다. 휠체어농구선수들에게 농구공·경기복 등을 후원하고, 자해와 자살을 일삼던 불우한 과거를 딛고 이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여고생에게 첫 뮤지컬 관람 경험을 선물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세브란스 직원 한 명이 쓸 수 있는 ‘나눔 종잣돈’은 5만원에 불과했지만, 뜻 맞는 사람끼리 그걸 모아 정성과 재능까지 더했더니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길은 이리도 다양했다. 신생아집중치료실과 신생아실 간호사들은 구세군 서울후생원의 어린 고아들을 위해 백일과 돌잔치를 열었다(맨 위).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에게 의료기구를 보낸 외래간호팀과 인공신장실 직원들은 감사의 손편지를 들어 보이는 아이들의 해맑은 사진을 받았다(가운데). 시설관리팀과 용역팀, 원무팀 등 6개 팀이 뭉친 연합팀은 열두 살 소년의 판잣집에 공부방을 만들어줬다(아래 사진).

작게는 직원 6명의 암병원 경영기획팀이, 많게는 사무팀·입원원무팀·시설관리팀·용역팀 등 6개팀 845명이 연합해 미혼모시설에 물품을 전달하거나 서대문구 불우 아동을 위해 집 고치기 봉사에 나섰다.

나눔에는 의사·간호사 등 의료진과 사무직원뿐 아니라 병원 청소·보안·주차 업무를 하는 외주용역업체 직원들까지 137개 전 부서 직원 6186명이 참여했다. 병원 개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병원 전체가 참여하는 나눔의 종잣돈 아이디어를 낸 윤도흠(59) 병원장은 "한번에 거액을 기부하거나 의료진만 참여하는 의료 봉사와 달리, 모든 직원이 고민하고 나눔을 실천하니 '팀워크도 더욱 탄탄해졌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팀마다 각자 재능을 발휘했다. 5만2000㎡의 청소를 담당하는 용역업체 직원 박영문(55)씨 등 4명, 전기 설비를 맡는 보안팀 직원 김정현(50)씨 등 10명은 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허름한 판잣집에 모였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30㎡ 규모의 판잣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모(12)군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오전부터 곰팡이 슨 벽지를 뜯어내고 바닥을 드러낸 장판을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오득환(55)씨는 "우리가 조금만 수고해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면 아이도 기분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과 신생아실의 간호사 24명은 지난 1월 24일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아동복지시설 '후생원'에서 백일·돌잔치를 차려줬다. 간호사들은 색동 한복을 입은 아기 6명을 품에 안고 첫 생일을 축하했다. 유순향 간호사는 "베이비 박스가 생겨나면서 3~4년 전부터 이곳으로 오는 갓난아기들이 늘어났지만 빠듯한 살림에 아기들 잔칫상을 차려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심혈관팀 간호사 24명은 거인병을 앓고 있는 이모(23)씨에게 서울 시내 맞춤양복점에서 꼭 맞는 검은색 양복을 선물했다. 이 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 꾸준한 치료로 건강을 회복한 이씨는 최근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면접에 입고 나갈 양복 한 벌이 없었다. 신장 194㎝, 몸무게 50㎏인 이씨에게 맞는 옷을 기성양복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100만원가량의 맞춤 양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간호사 류청(32)씨는 "의료진으로서, 오래 알고 지내온 병원 누나로서 큰 수술과 치료를 잘 견뎌온 환자가 사회에 힘찬 첫발을 내딛는 데 보내는 작은 응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