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한창 사회봉사 명령을 이행하고 있던 지난해 11월. 김 회장이 일하고 있는 서울 외곽의 한 장애인 재활 복지관을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김 회장이 재벌 회장님 행세를 하면서 이른바 황제봉사를 한다면, 그곳에서 특종거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지요.

아쉽게도 김 회장은 비교적 성실하게 사회봉사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복지관 담당자는 김 회장이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아픈 몸을 이끌고 지각 한 번 없이 나와 하루 8~9시간씩 봉사를 하고 돌아간다고 전했습니다.

가끔 건강 문제로 못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 일 없으면 아침 일찍 출근해 다른 장애인들과 부대끼며 묵묵히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일반인의 사회봉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함께 일하는 장애인들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군요. 그들에게 김 회장은, 별로 말은 없지만 가끔 빵이나 군것질 거리를 사다 주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장애인은 “(김 회장의 사회봉사가) 벌써 다 끝날 때가 됐느냐”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해 11월말 3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무탈하게 마치고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첫 작품이 다 아시는 대로 삼성과의 빅딜 성사입니다.

법원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강제 봉사를 했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는 4년전 법원 명령으로 사회봉사하다 진짜 봉사하는 사람들<2011. 6. 29> 이라는 기사를 통해 사회봉사 명령이 끝난 뒤에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항소를 했으니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비즈가 법조인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니, 항소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할 거라 본 법조인이 77명에 달했습니다. (조현아 1년 실형 관련 설문…법조인 "적절" vs 일반인 "부족" <2015. 2. 16>)

조 전 부사장이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불변의 이치입니다. 직원을 노예처럼 부리고 인간의 자존감을 짓밟은 건 확실하게 사죄를 하고 두고두고 반성해야 합니다. 조사 과정에서 증거 인멸을 시도한 것도 중죄입니다.

다만 법적 형평성에 어긋나는 여론 재판에 휘둘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문제지, 국민 정서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조 전 부사장의 유죄 근거가 된 항공보안법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법입니다. 항로이탈은 맞지만, 조 전 부사장은 법이 규정하고 있는 테러범은 아닙니다.

만약 법조인들의 예상대로 2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될 경우 조 전 부사장은 구치소에서 나오게 됩니다. 실형 1년이 유지된다 해도 내년 초면 형 집행이 끝나 자유의 몸이 되겠지요. 그 후엔 지금까지 다른 오너 재판이 그랬듯, ‘그런 사건이 있었지’하는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또 하나의 재벌 오너 일가 일탈 행위로 묻히기 전에, 그에게 사회봉사 명령이라는 과제를 주는건 어떨까 합니다. 안그래도 이번 사태의 기저에는 그동안 사회적 문제로 여러 차례 제기됐던 갑질 논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다 보면 재벌 일가라는 지위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리인지, 그에 따른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음은 이미 인식한 바일 터이니, 이제는 그 사회에 조 전 부사장이 보여줄 수 있는 배려를 조금씩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평생 우리 사회와 유리된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역시 언젠가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해야 할 겁니다. 그것이 그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사회봉사 명령을 시작으로 기여와 나눔, 그리고 오너 일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회복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