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반도 행정구역 체제가 대대적으로 바뀐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이다. 이 때 2~3개의 독립된 군현을 하나의 통합된 군으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옛 군현의 이름은 면 명칭으로 남게 되고 대도시에는 구 이름으로 남아있다.

옛지도 여행은 조선시대에는 독립된 군현이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옛 고을의 흔적을 찾는 답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갈 곳은 조선시대 경기도 부평부이다. 부평부는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를 관할하는 고을이었다.

▲ 부평부 지도(규10373), 조선후기 지방지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시대 부평부의 중심부는 현재의 인천 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부평부 여행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경기도 부천시도 아니고 인천 광역시 부평구도 아닌 계양구 계산동으로 가야 한다. 조선시대 지명은 부평이지만, 고려 고종 때 지명은 계양이었다.

▲ 조선시대 부평부의 대략적인 위치. 조선시대 부평부는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네이버지도 참조.

도시 전체를 조망하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옛 부평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 계양산(395m)이다. 계양산이 부평부의 진산이었다. 이 산을 가려면 인천 지하철 1호선 계산역 5번이나 6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등산복 입은 사람들을 따라 계산 2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면 계양산 입구가 나온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정상이 나온다. 약 2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이 알려지면서 지자체마다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계양산에도 둘레길을 만들어 산책할 수 있게 하였다.

산책이 목적이 아니라 장소의 의미를 생각하며 답사하기에 둘레길을 따라 가지 않고 산성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계양산 입구에서 숲길 안내도를 살펴보면 육각정과 팔각정이 등장한다. 이 중간의 능선에 계양산성이 있었다.

▲ 계양산성. 사진 왼쪽에 보이는 표지판은 2007년 2월에 계양산성 제 2차 및 3차 발굴 조사 결과를 설명해 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고성(古城) : 안남산(安南山)의 동남쪽인데, 둘레가 1천 9백 37척이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안남은 고려 의종 때의 이곳 지명이고 안남산은 계양산의 다른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 고성이 지금 계양산성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둘레가 약 1,180m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육각정 오른쪽 안내문이 세워진 이곳은 산성의 동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발굴 성과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육각정에서 정상방향으로 좀 더 올라가면 팔각정이 나오는데 계성정이라 이름붙여 놓았다. 이 옆에 계양산성 복원사업 안내문을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의 산성처럼 이곳도 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발굴과 복원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 산성의 전체 형태는 볼 수 없었다.

▲ 계양산성에 바라 본 계양산 정상

산성은 계양산의 정상부가 아니라 동남쪽에 해당한다. 팔각정에서 1,460m를 더 올라가면 계양산 정상이 된다. 정상에는 방송국 송신탑이 세워져 있었다.

산 정상에 서면 풍경이 좋은데 이곳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도시화가 된 곳은 아파트가 잔뜩 보이고 또 다른 쪽은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경인아라뱃길도 보인다.

송신탑 앞 산 정상에는 돌에다 계양산 설명문을 새겨놓았다. 그 내용 중에 ‘조선 고종 20년(1883)에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계양산은 한강 유역, 서해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한양의 입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러한 연유로 조선 말에 이곳에 또 따른 산성을 쌓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송신탑 너머 올라갔던 길과 다르게 징매이고개(생태통로), 계양산 산림욕장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중심성의 흔적을 찾으러 했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능선을 따라 연결된 하산로가 옛 중심성의 성벽이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계양산에서 부평부 전체를 조망했으니 이제는 부평도호부의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갔다. 부평도호부 청사를 검색하면 인천 부평초등학교로 데려다 준다.

▲ 부평초등학교 안의 옛 관아 건물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비석들이 쭉 늘어서 있다. 부평부사 선정비들이다. 선정비 앞에 아주 큰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수령 500년, 높이 25m에 달한다. 관아에 있었던 나무이이다.

은행나무 뒤쪽에 ‘어사대(御射臺)’라고 적힌 돌이 보인다. 어사대은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는 의미이다. 정조 21년(1797)에 왕이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수원 현륭원을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면서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어사대 뒤편에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곳이 보인다. 욕은지(浴恩池)라 부르는 곳이다. 오른쪽에 옛 연못의 돌들이 보인다.

욕은지 옆에 옛 건물이 서 있다. 부평도호부에는 여러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1909년에 이곳에 학교를 세우면서 한 채만 남겨서 옮겨 놓았다. 씁쓸하다.

▲ 부평향교

이제 향교라도 찾아가 볼까한다. 향교는 동국여지승람에 ‘부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다’고 적혀 있다. 부평향교는 경인교대 입구역 근처 계산 1동 주민센터 옆에서 볼 수 있다. 하마비가 세워진 홍살문과 향교 정문 사이에 도로가 나 있다. 향교도 반토막이 나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에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지만,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경기도에서 옛지도 여행을 하는 건 쉽지 않다. 휴전선이 있어 개발이 덜 된 경기 북부보다 경기 남부지역이 더 어렵다. 인천광역시와 부천시가 새로 생기면서 부평부의 옛 모습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옛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면 부평문화원과 같이 있는 부평역사박물관에 가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 동네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주민들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면 굴포 먹거리 타운, 부평종합시장, 부평동 해물탕 거리로 가 볼 것을 추천한다.

[<옛지도 읽기- 경기도 부평부 조선후기 지방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