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논설주간

스케이트 선수 박승희를 기억하는가. 지난해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2관왕에 오른 주인공이다. 7살에 스케이트를 시작해 15년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 박승희 선수가 돌연 종목을 바꿨다. 익숙한 쇼트화를 벗고 스피드 스케이트로 갈아 신었다.

같은 스케이트인데 뭐가 다를까 싶지만, 쇼트와 스피드는 전혀 다른 종목이다. 쇼트는 111미터 작은 트랙을 회전하며 스케이트 날 하나의 근소한 차이로 순위경쟁을 한다. 반면 스피드스케이트는 400미터 대형 트랙을 돌며 기록경쟁을 한다. 훈련 방식이 다르고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 몇 가지 바꾼다고 해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종목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가혹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박승희는 종목을 바꾼 후 반 년만에 스피드스케이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2위로 통과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변화의 고통을 극복하고 스스로 새 길을 열었다.

뜬금 없이 박승희 선수를 거론하는 것은 그의 도전이 작금의 한국 경제 상황과 유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 50년간 압축성장을 통해 경이적인 성과를 거뒀다.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62년 이래 반세기만에 10대 경제강국 반열에 올랐다. 고도 성장의 비결은 대기업 육성을 통한 수출 주도 모델이었다. 수출을 이끌 대표 선수로 대기업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성장의 파이를 늘리는 방식이었다. 워낙 성과가 좋다 보니 반세기 동안 경제성장의 기본틀로 작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 경제 지형이 바뀌면서 수출 주도 성장모델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출이 늘어도 성장률은 제자리에 머물고, 국민들의 주머니사정은 나아지지 않는 악순환에 빠졌다. 대표 선수들의 경쟁력도 예전만 못하다. 중국 등 경쟁국 선수들이 턱밑 까지 치고 올라왔다. 기량이 우수한 몇몇 선수만 믿고 있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에 의존하는 산업구조는 경제력 집중과 분배구조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재벌급 대표선수들의 배만 불릴 뿐 하위구조로는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고착화됐다. 기존 성장틀을 바꾸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과거 성장모델의 성과는 ‘혁혁’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모델이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글로벌 경쟁환경이 바뀌었고, 우리가 풀어야 할 내재적 문제의 수위가 달라졌다. 환경이 바뀌었으면 대책도 바뀌어야 한다. 기형적으로 쪼그라든 내수시장을 살리고, 중소기업이 대기업 못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성장틀을 바꿔야 한다.

쇼트트랙에서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박승희는 결단을 내리고 종목을 전환했다. 더 넓은 트랙에서 전혀 다른 근육을 사용하기 위해 기초부터 모든 걸 바꿨다. 쇼트에 길들여진 몸을 스피드에 걸맞게 변환시켰다. 경제로 말하면 대대적인 ‘구조개혁’이다.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는 일회성 경기부양이나 금리 조정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언 발에 오줌 누어봐야 당장은 따뜻하겠지만 근원적 처방은 될 수 없다. 고통스럽지만 밑바닥에서부터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 수십년을 내다보는 장기 계획 아래 기초근육과 훈련방식을 바꾸고, 소수가 아닌 다양한 선수군을 육성해야 한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가 4대 부문 구조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들고 나왔다. 늦었지만 맞는 방향이다. 개념 조차 모호한 창조경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남은 기간 구조개혁 기반 조성에 올인하는게 맞다.

모든 정책에는 '골든 타임'이 있다. 대부분의 골든 타임은 '현재'다. 현 정부는 최대한의 정책추진력을 동원해 '현재'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 정치권에 막혀, 이해집단의 반발에 막혀 또다시 손을 든다면 새로운 성장틀 마련을 위한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남은 기간 현 정권이 구조개혁에 올인해야 하는 이유다. 박승희 처럼 도전하고, 변화의 고통을 극복해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