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를 화려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제가 용납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어요. 결국 제 말대로 했죠. 고객이 정말 만족했구나 하는 건 행사 당일 알았어요. 제자리를 아놀드 슈워제너거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부인 옆자리로 잡아줬더라고요. 저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었죠.”

한국인으로 미국 최고의 파티 디자이너가 된 영송 마틴(56)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의 말에는 시종일관 힘이 넘쳤다. 인터뷰 내내 유쾌한 듯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2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근처 한 공연장에서 그를 만났다.

영송 마틴(Youngsong Martin)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

기억에 남는 가장 까다로웠던 고객이 누구냐는 질문에 영송 마틴 대표는 3시간이나 토론을 벌였던 미국의 유명 영화감독 얘기를 꺼냈다.

“고객이라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다 아시는 분일 거예요. 저를 3시간이나 세워 놓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마 기선을 제압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도 나름 원칙이 있었어요. 지지 않았죠. 저도 잘 모르는 수학 얘기까지 해 가면서 왜 안전문제가 중요한지 설명했어요. 나중엔 저보고 강심장이라며 웃더라고요.”

오프라 윈프리와 제니퍼 로페즈와 같은 할리우드의 유명 연예인들은 물론, 백악관 안방마님인 미셸 오바마까지 단골로 둔 파티계의 여왕. 패션ㆍ소품 디자인에서 이벤트 기획, 컨설팅까지 파티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이 그의 무대다.

영송 마틴(Youngsong Martin)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 상류사회의 결혼과 파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실제 21살 미국에 건너갔을 당시, 가난만큼이나 그를 힘들게 한 것이 인종차별이었다. 하지만 시련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 또 시작이구나 너희가 그렇지 뭐, 마음대로 해봐 하는 마음으로 꿋꿋하게 지냈어요. 그랬더니 나중엔 그 사람들도, 아니 저 기(氣) 센 여자가 여기 온단 말이야 하는 식으로 반응하더라고요. 백악관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영송 마틴은 파티 기획자인 동시에 80여명의 직원을 고용한 기업인이다. 그의 회사 와일드플라워 린넨은 본사인 로스앤젤레스(LA)는 물론, 미국 내 7곳에 지사를 뒀다. 2013년 서울에 사무실을 낸 데 이어 조만간 이탈리아 지사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영송 마틴이 디자인한 파티 현장. 핑크빛 파트텔 톤에 양초와 금박 장식으로 화려함을 더했다.

“미국에서는 파티가 엄청난 산업이에요. 일상이 파티니까요. 생일부터 결혼, 크리스마스, 연말, 그리고 2월에는 밸런타인 데이도 다 파티죠. 기부금 행사, 고아를 돕는 행사, 일반적인 모임이 다 파티에요.”

실제 미국 경영 컨설팅 업체 IBIS월드에 따르면 현재 미국의 파티 산업 규모는 40억달러에 달한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2.5%씩 성장했으며 종사자만 20만명을 헤아린다.

하지만 파티가 산업화한 건 미국에서도 최근의 일이다. 파티는 미국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비즈니스로 여겨지는 분야는 아니었다. 남의 파티를 도와주던 영송 마틴이 회사를 차린 건 2001년의 일. 강사로 있는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사업을 해보라 조언했지만, 누구 하나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나섰다.

영송 마틴이 디자인한 결혼식 현장. 붉은 계열로 정렬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테이블보를 하나 깔아주면서 600달러를 받겠다고 하면 보통 코웃음을 치죠. 저는 가능할 걸로 봤어요. 왜?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가격만 맞춰주면 되는 일이에요.”

그의 사업 철학은 철저한 고객 중심주의다. 상대가 할리우드 스타건, 정치인이건, 돈 많은 사업가건, 아니면 평범한 일반인이건 상관없다. 파티의 주인공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고객의 입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데요”라는 말이 나오면 성공이다.

“마이애미나 댈러스 쪽은 아주 화려한 파티를 선호해요. 반면 뉴욕은 점잖은 분위기를 원하죠. 또 와인 생산지 같은 시골은 또 시골만의 정서가 있어요. 고객마다 원하는 게 다 다르죠. 그런 차원에서 보면 LA는 파티사업을 하기에 너무 좋은 일터에요. 모든 게 다 있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가 바로 옆이니.”

할리우드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영화에도 곧잘 등장하곤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0대 소녀와 뱀파이어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트와일라잇의 2011년 작, 브레이킹던 파트1에 나온 결혼식 장면이 그의 손을 거쳤다.

영송 마틴이 디자인한 미국 영화 <트와일라잇>의 숲 속 결혼식 장면. 인위적인 장식을 없애고 녹색과 흰색으로 색을 통일해 순수한 사랑을 표현했다.

“사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처음엔 어떻게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질까 하는 편견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죠. 영화 내용이나 배경은 잘 모르겠고, 보편적인 결혼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거죠. 반응은 아주 좋았죠.”

그의 강점은 럭셔리다. 럭셔리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디테일에서 나온다고 그는 믿는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만드는 것이 럭셔리의 기본이다. 지퍼가 들어갈 때 처음부터 끝까지 아귀가 딱 맞아야 하고, 의자커버도 사람이 입는 옷과 같은 재질로 만든다.

“품질을 보고 다들 놀라요. 중국에서 제 디자인을 모방을 많이 하는데 해 놓은 거 보면 비슷하긴 한데 많이 달라요. 디테일을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건물도 딱 보면 럭셔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귀퉁이 대리석까지 빈틈없이 마감한 건물은 많지 않아요. 럭셔리가 아닌 거죠.”

그도 한때 40달러짜리 캘빈클라인 청바지가 너무나 입고 싶었던 가난한 유학생인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어 1달러짜리 싸구려 청바지를 사 기워입고 잘라 입고, 다른 옷감을 덧대 입었다. 창피하지 않았다. 그의 감각은 유별났다. 친구들이 따라 입기 시작했다. 타고난 걸까.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6ㆍ25 전쟁 직후 옷 염색을 해 팔았다고 해요. 그 당시엔 옷이 귀해서 군복 같은 걸 떼다가 염색해 입었잖아요. 지금 같으면 염색 디자이너였던 거에요. 어릴 땐 그걸 몰랐어요. 2011년에서야 그 얘기를 들었죠. 아, 이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구나 했지요.”

그가 보기에 한국 역시 사업을 하기에 나쁜 곳은 아니다. 2013년 서울에 사무실을 연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단순히 결혼과 같은 이벤트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주최하는 포럼과 같은 딱딱한 행사도 파티처럼 꾸밀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송 마틴(Youngsong Martin)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

“파티는 관광업과 연관이 있어요. 행사 산업인 마이스(MICE)의 핵심이기도 해요. 아주 뻔한 비즈니스 미팅을 파티로 바꿔주는 거죠. 시작은 단순해요. 참가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 또 오고 싶게 만드는 것, 아, 내가 정말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에요.”

☞영송 마틴은
195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 종로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 FIDM(The 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수학했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2001년 지금의 회사를 차렸고 2013년 서울에 지사를 냈다. 마틴은 그의 남편 성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