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9월이 지나도 남아 있던 끈끈한 더위와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찬 기운에 진저리를 치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엄마와 때로는 마음에 추를 달듯이 무딘 것처럼 무심하게 시간의 중심에 섰던 담담한 표정이 생각난다. 엄마는 늘 그랬다. 섬세한 듯하다가도 굵직하게 무게를 주는 선이 있다.”

“지금 마당에 빨간 손톱과 같이 튤립 싹이 나오고 있다. 꽃이 피면 울어버릴 것 같지만 엄마는 계시지 않는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는 어머니의 글처럼 땅으로 스며버리신 것인가.”

“나는 엄마의 글을 다시 읽으면 꼭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데 그걸 쓸 때의 엄마의 표정, 걸음걸이, 조바심과 서성임, 쾌활했던 몸 움직임, 봉투를 뜯을 때의 신경질적인 손놀림, 비스듬히 누워 보시던 책들의 아름다운 표지와 제목,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안타까운 눈빛까지도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내 정신이 흩어지려고 할 때 엄마를 생각한다. 걸음걸이가 삐걱거릴 때 걸음에만 집중하라고 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아무 말이나 튀어나올 때 엄마가 내 입을 조용히 막는다. 이제는 그게 귀찮지가 않고 고맙기만 하다. 이제 내 나이가 자유보다는 절제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또 목소리가 들린다. 네 마음대로 하여라.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거라. 너는 너니까.”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중에서)

‘엄마’ 박완서를 떠나 보낸 지 4년. 엄마의 딸이 그를 기억하며 쓴 글을 모은 수필집을 냈다. 맏딸 호원숙 작가의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달). ‘엄마 박완서를 쓰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말 그대로 ‘사모곡(思母曲)’이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표지

때마침 작가 박완서의 산문집(문학동네, 총 7권) 발간에 즈음해 나온 이 책은 그것대로 잘 쓴 에세이 묶음이면서, 이땅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에 대한 가장 내밀한 관찰자의 기록이자 묘사로 읽힌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가 추억하는 엄마 이야기 너머로 대작가의 사적인 표정이 비치다가도 이 시대 우리 엄마들의 주름진 얼굴이 함께 일렁이기도 한다.

호씨는 이 책 어디에선가 이렇게 썼다. “엄마가 작가로 세상에 나오기 전의 모습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는 그것을 기록할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완서가 떠나고 없는 지금,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딸의 글을 읽고 못다 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른다.

연락을 하면서도 ‘박완서의 딸’이라는 수식어나 인터뷰의 동기를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전에 질문 요지를 알고 싶다고 했고, 인터뷰 당일에는 질문을 출력한 종이에 답안 작성하듯 꼼꼼히 뭔가를 적어왔다. 예순이 넘은 ‘할머니’임에도, 엄마를 떠올릴 때의 표정은 아직도 여전히 ‘엄마의 딸’이었다.

박완서 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 그의 글쓰기 공간이었던 구리 아치울마을 어귀 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1998년 어머니는 이십 년 가까이 살았던 아파트 생활을 접고 구리시 아치울에 집을 지으시게 되었다. 어머니의 꿈이었던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집 앞으로는 아차산으로부터 작은 냇물이 흘러내려왔고 나지막한 밤나무 숲이 보였다.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스패니시 옐로의 외벽을 한 집은 어머니가 혼자 생활하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이었다. 어머니가 지은 집에서 처음 오 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대가족처럼 살았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아치울마을 이름이 참 곱다. 살기는 좋은가?

어머니가 여기 1998년에 집을 지었다. 그전부터 집을 갖고 있기는 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다가, 새로 집을 짓고 우리 가족이랑 아이들과 한 5년 같이 살았다. 그러다 아이들 학교가 너무 멀어서 따로 살림을 나갔다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내가 들어와서 지냈다. 돌아가신 후에는 그냥 내가 살게 된 것이다.

작가 박완서(왼쪽)와 맏딸 호원숙

“유난히 마당에 볕이 잘 드는 집이었던 뜰에는 늘 꽃이 가득했다. 엄마는 그 뜰 전체에 잔디를 깔고 곳곳에 꽃을 심었다. 엄마의 뜰 가꾸기 취미는 아주 오래전 고향인 개성 사람들의 취향에서 왔다는 것은 장편소설 ‘미망’을 보고야 알게 되었다. 이곳 아치울에 집을 짓고 이사 올 때 가장 기뻐하신 이유는 마음대로 가꿀 수 있는 뜰을 갖게 된 거였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책에 꽃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꽃을 가꾸는 것은 어머니의 오랜 습관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도 아프리칸 바이올릿 이런 것을 항상 심으시고, 조그만 집에 살 때도 사러 다녔다. 이 집에 와서는 같이 마당도 가꾸곤 했다.

오늘도 어떤 분이 어머니가 생전에 “우리 집에 꽃이 백 가지가 넘는다”며 자랑했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집에 굉장한 정원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냥 보통 마당이라는 거다. 실제는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고 잔디 조금 있고 하는 정도다. 그분은 어머니가 그렇게 자랑삼아 말씀하시는 게 무척 귀여웠다고 했다. 언젠가 한번 실제로 헤아려 보니 작은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100가지가 넘었다.

-이번에 같이 나온 박완서 산문집(총 7권)을 보니 소설 이외 글들도 방대하다. 읽다 보니 선생이 쌓아올린 글이 큰 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에 산문집이 내 책과 같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출판사는 그렇게 기획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이번에 다시 나온 산문집은 다 절판이 돼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빼놓고는 다 살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자료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검토를 하다가, 읽다 보니 좋은 게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출판을 하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동생들과 함께 교정도 보고 한 게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다.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일곱 권의 책에 묶인 글들을 보면 70~80년대 우리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 같았다.

그때 정말 힘들게 치열하게들 살지 않았나. 그때는 우리나라가 풍요로워지는 때인데도 어머니께서 경고를 많이 하셨더라.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인간다워야 한다, 아무리 부가 있어도 가난해서 우는 사람이 있는 부는 아름다운 부가 아니다, 꼭 이런 단어를 쓰신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더라.

또 어떤 사건들, 우리는 다 잊어버렸지만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얘기들도 있더라. 어떤 교사가 어린 학생들 유리창 닦는 것 대신하다가 추락사한 교사를 추모한 글이 그렇다. 지금 봐도, 그때는 그런 선생님이 계셨구나 싶다. 요즘 교권이 무너졌다고들 하는데 그땐 그런 훈훈함 같은 게 있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가 구두를 고치러 갔더니 구두 닦는 사람이 구두를 고치기 전에 먼저 깨끗이 닦더란다. 어머니 생각에 구두 닦는 값까지 챙겨 받으려나 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구두를 잘 고치기 위해 먼저 닦은 거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도리어 작가로서 평소 항상 원고료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구두 고치는 사람이, 그것도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하는 정신노동이 높은 단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자성한 대목도 있다. 지금 봐도 참 좋은 글이다.

우리 가족의 어떤 잊어버린 얘기들도 있다. 그때는 바캉스를 갔다오면 청바지 같은 데 모래를 잔뜩 묻혀왔는데, 그걸 빨래하는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자식들이 해수욕 가서 묻혀온 모래알도 사랑스럽게 여긴다. 그걸 보며 어머니로서 더 감사하게 된다.

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신 지 4년이 됐다. 엄마의 부재가 가장 사무칠 때는 어떨 때인가?

글쎄… 꽃이 피었을 때다. 어머니가 생전에 항상 꽃이 핀 걸 보면 “얘, 얘, 와서 봐라” 하시곤 했다. 나도 꽃을 보면 “엄마, 이것 보세요” 했다. 그리고, 중요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면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기쁜 일 있을 때도 생각나고.

-최근엔 그런 때가 언제였나?

손녀가 예쁜 표정을 지었을 때다. 같이 보셨으면 얼마나 이뻐하셨을까 싶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저녁 때 TV 드라마를 잘 보셨는데, 드라마보다 거기에 나오는 애들을 더 좋아하셨다. “나는 쟤 보려고 드라마 본다”고 하셨다. 드라마 속 어린 애들을 그렇게 이뻐하셨는데 증손주는 얼마나 이뻐하실까.

나는 요즘도 엄마의 글을 다시 읽으면 꼭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그 글을 쓸 때 엄마의 표정, 걸음걸이, 조바심과 서성임, 그 쾌활했던 몸의 움직임, 봉투를 뜯을 때의 신경질적인 손놀림, 비스듬히 누워 보시던 책들의 아름다운 표지와 제목,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안타까운 눈빛까지도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목이 메고 눈물이 어린다. 엄마의 끔찍한 사랑이 와닿기 때문이다. 평소 차가울 정도로 사랑의 표현을 절제하셨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아 슬프다. 그 장면 이후에 우리 가족에게 닥친 고난을 생각하면 가슴이 찔리듯 아파온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엄마 박완서는 어떤 사람이었나?

내게도 그냥 엄마였다. 내 책에도 뜨개질을 하시거나 옷을 만들어 주시거나 한 얘기를 많이 썼는데, 사실 우리 어머니만의 특별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 당시 엄마들은 다 집에서 뜨개질해서 집에서 애들 옷 입혔다. 그때는 뭐 ‘간단룩’이라고 해서 원피스 그런 것 직접 만드셨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렇게 입히고 먹이고 했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박완서 선생은 늦은 마흔 나이에 첫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가 작가로 나설 것을 예감했나?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가족들에게 얘기하셨다. 화가 박수근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저녁 준비하시면서 아버지도 계시고 가족끼리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쓰신 게 ‘나목’이었다.

박완서 첫 장편소설 '나목' 표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박완서는 대작가다. 집에서는 어떻게 비쳤나?

나는 그때 고 2였다. 그나마 철이 난 편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작품 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심부름도 많이 했고. 당시 학교 갈 때 어머니 원고를 갖고 나왔다. 그때는 택배도 없을 때니까, 책가방에 넣어 뒀다가 방과 후에 신문사, 출판사 이런 데다 내가 직접 갖다 주곤 했다. 원고는 절대 열어보지 않았다. 출판돼 나오면 읽긴 했지만. 내가 미리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우체부가 남의 편지 뜯어 보는 것처럼.

-어머니가 열어보지 말라고 한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내 스스로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충실히 배달했다. 그때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라든가 지금은 원로가 된 분들을 얼굴로 많이 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글을 많이 쓰시면서 언젠가부터는 그쪽에서 원고를 받으러 오곤 했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우리 집이 한옥이었는데, 누가 원고를 받으러 와서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냥 엄마를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를 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거다.

작가는 뭔가 그럴 듯한 모습으로 있는 줄 알고. 한참을 들어와서 작가님은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제서야 “접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당황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걸 재미있게 생각하셨다. “내가 좀 그래 보였나 보다” 하시면서도,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했다.

-할머니(박완서의 시모)나 아버지(남편)는 엄마의 글쓰기에 대해 우호적이었나?

할머니는 처음엔 무조건 경사라고 좋아하셨다. 시상식에도 가셨고. 아버지는 엄마를 워낙 사랑하셨으니까 마음으로는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글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문 이외 활자 책은 거의 안 보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배려는 해주셨다.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아버지 수발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박완서

-엄마와 아내, 며느리, 작가, 1인 4역을 해낸 셈이다. 억척이었을 것 같다.

많이 힘드셨다. 적어도 70-80년대까지는. 80년대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특히 70년대 연재소설 쓰실 때 굉장히 힘드셨다. 그때는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많이 힘이 드셨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억척이라는 단어는 안 어울린다.

“나에게 엄마의 첫 소설을 읽은 밤은 마치 혁명 전야 같았고 태풍 전날 밤과 같았다. 그러나 엄마의 생활은 변화의 예감처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후 사십 년 동안 수많은 글을 쓰셨고 가족사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엄마는 비슷한 호흡과 자세로 살아가셨다. 그건 엄마가 마지막 작품을 쓸 때까지 처음 ‘나목’을 쓸 때와 같은 영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런 걸 줄곧 지켜본 나는 그 모든 것이 놀랍기만 하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작가 박완서(오른쪽)와 맏딸 호원숙

-‘가족사를 문학으로 다 풀어냈다’고 했다. 가족의 일원으로 작품을 볼 때는 어떤 기분이 드나?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어머니가 가장 많이 다룬 것은 6·25 때를 중심으로 한 (박완서의 성장기) 가족사이지, 우리 가족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끼리는 “어머니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셨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참 많이 안 쓰셨다”고 얘기한다.

가족 이야기도 당신의 가족사를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쓰신 게 아니라, 그 시대와 그 사회,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았나, 견뎌냈나 하는 것을 쓰신 거다. 단순히 우리 가족이 이렇게 살았다는 차원의 글은 아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개인이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냈나, 어떻게 이겨내고 고난을 당했나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족 이야기를 한 거다.

가령 노인 문제만 해도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면서 실제로 어렵게 겪었으니까. 가족 속에서 나이가 들면서 늙어가는 모습을 하나의 문학적 소재로 쓰신 거다.

-에세이에 “엄마가 작가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움보다는 엄마를 문학에 잃었다는 상실감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 울먹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쓴 대목이 있다.

엄마는 가정의, 가족 생활의 중심이다. 엄마라는 위치가 그렇지 않나. 특히 우리 어머니는 그랬다. 아버지한테도 엄마가 제일이었고, 할머니한테도 우리 엄마가 제일이었다. 그런 가정의 중심 인물이 문학을 하게 되었으니, 엄마에게 가정이 중심이 아니고 문학 세계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상실감이 그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머니 작품을 읽고 나니까 밥을 못 먹겠더라. 어머니의 세계에 갑자기 이물감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 보면 그렇진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아마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할 때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전에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던 일이니까. 그때 내가 고2여서 독서도 많이 할 때였는데. 그전까지는 책도 별로 안 읽고 공부도 잘 못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공부도 잘 하고 독서도 많이 했다. 지적으로 왕성해질 때였다. 감성 같은 것도 빠르게 자라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의 교육열이 굉장했다고 했는데.

우리 집안 전체가 그랬다.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자기가 자립하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분위기였다. 공부하는 사람은 우대를 받았다. 시험이 닥쳤거나 하면 항상 집에서 제일 대접을 잘 받았다. 좋은 것도 먼저 주고 그랬다.

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대작가의 딸이어서 행복했나?

좋다, 싫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나는 어머니가 작가가 되기 전에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는 다른 분과는 다르다, 특별하다고 여겼다. 항상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많은 책을 보고 지혜가 있고, 우리한테 언제나 어떤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작가가 되기 전에도 존경했고 작가가 되고 나서는 좋은 작가가 되셨으니까 더 그랬다.

-에세이집에 보면 어머니는 '늘 멀었다' '엄마의 표정이 그렇게 낯설고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무심한 표정' 이런 대목이 많다. 결국에는 '멀면서도 가까운 거리감' 그걸 사랑하게 되었다고 썼다. 어떨 때 그랬나? 왜 그랬을까?

작가들이 그렇지만, 어머니가 글에 몰입하는 동안에는 다른 것에 신경쓸 수가 없다. 여기 같이 살 때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장편을 쓰셨는데, 한 번에 계간지에 원고지 300매 분량을 보내셨다. 내가 한 집에 있으면서 쓰시는 동안 어머니 기력이 떨어지실까봐 유동식 같은 것 준비해서 드리곤 했지만, 칠십 가까운 나이에도, 더운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써서 보낸다는 것은 보통 집중력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런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버린 거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거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주었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맏딸인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어른 취급을 했다.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다보니 어머니의 눈빛 하나로 통제를 했다고나 할까.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한글을 가르쳐주셨고 맏이인 나에게 철저히 공부를 시키셨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유명인의 사회적 페르소나가 가정에서의 모습과 다르거나,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겉과 속이 다른 적이 별로 없으셨다. 가족들에게는 더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우리 어머니는 일반적인 사랑을 안 하셨다. 아이들한테도 꼭 각자에게 맞는 사랑을 주셨다. 자녀가 너덧 있으면 그 아이한테 맞는 사랑을 해주셨다. 걔한테는 이게 필요하겠다, 하시면서 그렇게 해주셨다. 그러니 모두가 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호원숙 작가의 경우에는 어떤 사랑을 받았나?

나는 맏이였고,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내가 여러가지로 어머니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고, 그걸 항상 염려하셨다. 내가 최고 학부를 나오고도, 아이를 낳고 가정에 지내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힘들어 하셨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때 아이를 잘 기르는 것이 내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내 생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내게 당신의 연대기를 써 보라고 하셨다. 나만큼 당신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로서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었다. 내가 기자(‘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 생활도 했지만, 겨우겨우 인터뷰 기사 같은 것을 쓰는 정도였다. 그래서 어머니 연대기도 아주 어렵게 썼다. (1992년 출간된 ‘박완서 문학앨범’에 실린 작가 일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썼다.) 글을 잘 쓴 것은 아니지만 그 안의 내용은 하나도 거짓이 없었다.

나만이 보관해놨던 자료들이고 나만이 봤던 자료들이니까. 그것이 작가에 대한 1차 자료였고, 많은 문학 연구자들한테도 인용됐다. 물론 충분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걸 다시 보충해서 2000년도 초반에 썼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또 세 번째를 썼다. 이번 책에 포함된 것도 그 중 하나다.

작가 박완서와 맏딸 호원숙

-어머니와 같은 소설가는 아니지만, 결국 비슷한 글쓰기의 길을 가게 됐는데.

어머니한테도 그랬겠지만 문학이 곧 내 생활이었다. 어머니가 책을 보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때는 현대문학 같은 문예지를 보고 있을 땐데, 나는 한자도 모를 땐데도, 표지의 한자 제호가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어머니 옆에 늘 놓여있던 그 문예지가 나로서는 동경의 세계였다.

하지만 내가 국문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대학 4년 동안 글을 제대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국문과 갔으니 대학원에 가서 연구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문학개론이나 이론, 문학사 이런 데 흥미가 없었다. 내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읽기만 많이 읽었다.

-원래 꿈은 뭐였나?

어릴 때부터 늘 바뀌었다. 꽃 가꾸기나 원예도 하고 싶었고 신문기자도 하고 싶었고. 하지만 꿈이 다 이뤄진 것 같다. 기자도 신문은 아니지만 해봤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소설을 쓰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나 자신을 라이터(writer)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사람. 써야 하는 경우에는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처럼은 아니다. 그런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운명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나는 어머니만큼 치열한 시대를 산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 내 능력 이상의 것을 꿈꾸지는 않았다.

“모녀가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어느 순간 엄마의 세계에 내가 함몰되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딸로서 엄마를 사랑하고 작가로서 존경하지만 내 생활에서 엄마의 비중이 커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 솟아올랐다. 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눌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숙제를 채 마치지 못한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큰 산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나의 작은 언덕을 일구기 시작했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엄마는 돌아가셨어.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마. 너는 작가도 아니고 그저 작가의 딸일 뿐이야. 그동안 많이 애썼잖아”라고 독백한 대목도 나온다.

나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힘들 때도 많다. 어떤 얘기를 할 경우에도 조심하게 된다. 사람들은 내가 얘기한 거라고 보지 않고, 누구의 딸이 그랬다더라고 하기 쉬우니까. 나를 소개할 때도 내 이름보다는 ‘누구의 딸’, 어떨 때는 내 이름도 없이 그냥 ‘누구의 딸’입니다,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가였으니까. 지금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오랜 팬들이 많았다. 나도 어머니 작품을 통해 성장해왔다.

어머니는 굉장히 개인주의적이었다. 누구를 거느리지도 않으셨고 누구의 거느림을 당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그 점을 가장 좋아한다. 누구를 거느리지도 않고 누구를 섬기지도 않은 그 점이 참 좋다. 보통 누구를 보면 누군가를 섬기거나 아니면 수하를 거느리지 않나. 특히나 어머니 같은 대작가라면 그럴 만도 했을 텐데,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는 없었다.

물론 어머니를 좋아하고 지금까지도 나한테조차 어머니 팬이라고 잘 해주시는 분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는 가족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한번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품에 대한 어떤 평을 받거나 했을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작가로서 자기만의 공간이 있었던 거다. 문학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고독하셨던 거지. 그렇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굉장히 따뜻하셨다. 행여 사람을 차갑게 대하거나 무시한 마음이 들 때가 있으면 금세 반성하셨다. 또 굉장히 유연하셨다.

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작가 박완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나 시선은 어떤 것 같나? 그 사이 변화가 느껴지나?

굉장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주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놓친 부분도 없지 않다. 그게 아쉽다는 것은 아니고. 결국에는 다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책이 남아 있으니까.

-놓친 부분이라면 어떤 점인가?

어머니 작품이 굉장히 많은데,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전집을 추리면서 어느 하나만 빼셨다. 딱 한 권. 그것 말고는 다 포함시켰다. 그 정도로 실패작이 별로 없었다. (그 작품이 무엇인지는 언급을 피했다.)

물론 많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어머니의 문학의 구조물은 굉장히 단단하다. 그 안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 숨은 코드가 많다. 대부분 다 못 읽는다. 아주 예리한 사람은 알겠지만. 어머니 작품을 두고 사람들이 쉽다고 한다. 쉬운 것은 맞다. 누구나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쉬운 것만은 아니다. 하다 못해 동화로 쓰신 것도 그냥 쉬운 게 없다. 그 안에 많은 코드가 들어있다. 그걸 다 잡아내는 게 쉽지 않다. 또 언어가 풍부하기 때문에 작품 속의 낱말 언어만 갖고도 우리 말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어딘가에 쓴 적도 있는데, 어머니 장편소설 ‘나목’에 미군부대 PX가 나온다. 그걸 그렇게 잘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첫 작품인데도. 70년대 당시 미국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를 때였다. 반미다 뭐다 하는 말도 잘 없던 때다. 그런데도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지 그런 것을 꿰뚫고 있었다. 나중에 ‘그 남자네 집’에도 다시 나오는데, 그런 것은 아무나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같은 작품은 여성학 같은 것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신문 연재 소설이었는데, 여성의 자기 자립을 다뤘다. 여성이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립해야 자립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어머니는 남자들이 뭘 잘못해서라고 탓하기보다 여자 스스로 서라, 자존감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많이 전했다. 공부 많이 하라는 얘기도 했고.

-전집에서 빼기로 한 작품은 뭔가?

옛날에 출판은 됐던 건데 이번엔 빼자고 하신 작품이다. 기법과 소재가 약간 모방이라고 할까, 표절까지는 아닌데 맘에 안든다고 하셨다.

-작가 박완서 필생의 문학적 화두는 뭐였나?

글쎄. 한마디로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어머니는 아마 균형감각이랄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시했다. 그러니까 편재(偏在), 치우치는 것을 싫어하셨다. 부의 편재 같은 것도 그렇고, 세상에서도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다 중요하다고 보셨다. 뭐는 옳고 다른 건 틀렸고가 아니라. 항상 그렇게 생각하셨다. 또 내가 항상 어머니 얘기를 하면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셨다. 자유로운 것을 제일 좋아하셨던 것 같다.

“소설의 거리[材料]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 버림받은 쓰레기 속에, 외면당한 남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소설의 거리는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연히 얻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삶에 대한 꾸준한 통찰력, 따뜻한 연민, 때로 열정적인 애정에 의해서만 그것을 볼 수가 있고, 주워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주워 올린 다음입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선 주워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 중에서)

-우리 문단도 순수와 참여로 갈리곤 했다. 그럴 때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나?

단순한 균형감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필요할 때는 무엇이든 하셨다.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에 후원을 하셨을 때도 그때는 그게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한쪽에서 이문열 선생 책을 불태우고 할 때는 “그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내셨다. 그러자 반대편에서는 “박완서는 아니다” “맛이 갔군” 이런 소릴 했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전혀 흔들림 없었다. 그게 난 존경스럽다.

“어머니는 아무 편에도 서지 않았다. 가족이 모여도 의견이 첨예하게 달라질 수 있는데 어머니는 누구 편도 들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얄미울 정도로… 어머니의 의견이 없어서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어디에도 편을 들지 않는 균형감각과 판단력은 놀라웠다. 어머니는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자리에서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지식이나 의견을 힘주어 말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나 지식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끝까지 들어주었고 쉽게 누구를 평가하지 않았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나는 참여도 좋아하고, 순수도 좋아하고, 심지어는 참여하고 순수하고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나더러 참여냐 순수냐 그 어느 편에 속하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지면서 다만 슬픔을 느낄 뿐이다.” (박완서, ‘작가의 슬픔’ 중에서. 산문집 3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수록.)

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평론가들 중에는 누가 어머니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보나?

평론가들이 너무 많다. 이번에 소설 전집도 나왔는데 여러 평론가들이 한 권씩 맡아서 새로 썼다, 단편집도 7권 각 권을 한사람씩 맡아 썼다. 다들 대단한 평론가들이다. 어떤 것은 평론만 봐도 대단히 멋있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내가 읽은 박완서’(2013)라는 책을 따로 냈을 정도인데. 원래 각별한 사이였나?

그 책이 나오자마자 프레시안에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김윤식 선생은 내 대학 스승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분이 굉장히 차갑고 사람들하고 사귀고 할 분이 아닌데, 어머니하고는 굉장한 절친으로 지냈다. 책도 내시고, 평론도 많이 쓰셨고. 우리 가족과도 가깝게 지냈다.

어머니와 그분이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 4학년 때였다. 강의 시간에 어머니 얘기를 하시길래, 내가 선생님을 따라가서 “우리 어머니입니다”라고 했다. 그 후 어머니 첫 창작집을 그 선생님이 평론가로 관계한 일지사에서 냈다. 책이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그 출판사에서 낸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 책이 참 아름다워서, 어머니 책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좋게 나왔다. 첫 창작집부터 내 꿈이 이뤄졌다.

-어머니가 가장 아낀 작품은 무엇이었나? 나목인가?

그건 어머니를 작가로 서게 한 첫 작품이었으니까. 처음 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던 거고. 가장 공들여 쓴 작품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에 비해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데. 그 두 작품이 사실은 2부작이었다. ‘그 많던 싱아’가 먼저고 ‘그 산이’가 다음이었는데 참 좋은 작품이었다.

-호원숙 작가가 보기에는 어떤가?

나는 원래 개인적으로 어머니 작품에 대해 불편해 했다. 그런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고는 어머니 작품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때 처음으로 마음에 훈훈한 느낌을 가졌다. ‘미망’(1990)도 좋아한다. 쓰는 동안 굉장히 힘든 과정을 거치셨는데, 그래도 그걸 잘 마무리해 완성했다는 것이 아름답다고 할까.

박완서 산문집(총7권) 1권

-아직도 미출간 원고가 더 남아 있나?

글쎄.(웃음)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도 출판을 많이 했다. ‘세상에 예쁜 것’ ‘노란 집’ 같은 책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온 거다. 남은 소설도 다 했고. 어머니가 쓰신 게 굉장히 많다. 하지만 출판을 하기에는 좀 떨어지는 그런 것들은 내가 가려냈고, 편지라든가 일기라든가 그런 게 있지만 아직은 출간 계획이 없다.

-요즘도 작품을 찾아서 읽어보고 하나?

갑자기 무슨 구절이 생각날 때 어디서 봤을까 하다가 찾아보기도 하고. 어떤 기분이 들 때 그때는 어땠을까 하면서 또 찾아보곤 한다. 일전에도 어머니 단편소설인데,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이라는 초기 작품인데, 읽다가 깜짝 놀랐다. 단편인데 어떻게 그때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싶었다. 요즘 ‘미생’인가 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거기에 나오더라.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엄마로부터 따로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나? 아니면 도움이라도?

어머니는 한번도 그런 것은 따로 가르친 적이 없다. 그냥 어머니께서 ‘죄와 벌’ 같은 고전에 나오는 장면들을 얘기해 주시면, 그 장면 나오는 데까지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그랬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나? ”내가 생각해도 문학을 멋지게 가르치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사람이 없구나”라고 썼던데.

그전에 명동성당에서 몇년간 시니어 아카데미 문화센터 같은 것 강의했었는데. 그분들이 지금도 개인적으로 와서 모임을 하는 정도다. 강좌를 하는 것은 없고, 요청이 들어오면 학교에서 강의 해달라고 한다거나 그런 일이 가끔 있다.

-그렇게 잘 가르치나?(웃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자랑이 아니고.(웃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을 상대로 직접 짠 시니어 문학 프로그램이다. 그래도 오래 해서 수준들이 높다. ‘글 쓰는 노년은 아름답다’는 책도 엮어줬다.

책 읽기와 글 쓰기를 병행한다. 글제로 화두를 던지는 식인데, 예를 들어 4월이면 사월 이런 식으로. 요즘은 그렇게 하면 재미없으니까 다른 식으로 한다. 어떤 책 제목을 낸다. 지난번에 ‘저물 녘의 황홀’을 냈다. 어머니 작품인데, 제목으로 좋은데 많이 안 알려졌다. 윤대녕 작가 작품을 제목으로 주기도 하고, 시집도 읽히고 시를 써 보게도 한다. 요즘 작가나 신간도 읽힌다.

-제목 얘기를 해서 말인데, 박완서 작품은 제목으로도 많은 사람이 경탄했다. 손수 지었나?

당연히 그랬다. 다 직접 지으셨다. 제목에 굉장히 힘을 썼다. 촌철살인으로. 그러다 보니 오히려 다른 데서 어머니 작품 제목을 너무 많이 써먹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문학 강의도 잘 할 것 같다.

나는 어머니 작품은 많이 읽고 연구도 하는데, 다른 작가에 대해서는 그냥 즐기는 수준이다. 어머니 작품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강의도 한 적이 있다. 요즘도 가끔 그런 기회들이 있다.

작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

-1월 22일이 기일이었는데 어떻게 보냈나?

늘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어머니가 평생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모님 제사를 지낸다. 그전에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지내고. 제사는 집안 식구만 있으면 그냥 차려 먹는데, 이날 사람들이 좀 많이 오니까 음식을 뷔페식으로 준비해서 제사 음식이랑 같이 먹는다. 지인이나 문인, 출판사 관계자들도 온다.

-일반 독자도 찾아오나?

요즘도 집에 가끔 찾아 온다. 무작정 오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 연대기를 세 번 고쳐 썼다고 했는데 본격적인 전기를 쓸 계획은 없나?

91년에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내고, 2001년, 사후인 2011에 차례로 더해서 냈다. 별도의 전기는 내 머리 속에는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은 없다.

-박완서 문학관 설립 계획은?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지금도 문학자료관은 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부터 있었던 거다. 그건 지자체에서 했고 어머니도 하라고 해서 했다. 내가 중재를 했는데 “좀 큰 데 하지, 왜” 하니까 “그러지 마라, 가까운 곳에, 우리 사는 데 둬라”고 하셨다.

(2011년 4월 구리시가 아치울 마을을 ‘박완서 문학마을’로 꾸미는 기념 사업을 추진했지만 유족들이 사양했다. 당시 가족들은 “어머니는 생전 지역사회를 사랑하셨고 아치울 생활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작가가 살고 있다고 해서 어떤 표지를 남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마을 이름이나 버스 정류장에 어머니의 이름을 넣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박완서 기념관도 바라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보통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어 하셨고, 책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어 하셨다”고 밝혔다.)

박완서 산문집(7권)

◆박완서가 기억했던 어머니

나의 어렸을 적,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삼모자녀(三母子女)가 차린 최초의 서울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두마니 올라앉아서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걸로 믿으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해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옷을 입고 싶어할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 점수를 잘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 모르고 우두망찰을 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드셨다.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그것밖에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거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댈 수밖에 없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어머니는 때때론 낮은 한숨을 쉬시면서 이렇게 조바심하셨다. “이야기를 너무 바치면 가난하다는데…”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효능의 꿈을 꾸겠다. (박완서 산문집 4 ‘살아있는 날의 소망’에 수록된 글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중에서)

박완서

◆박완서 연보(발췌)

-1931년 10월 20일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 아버지 박영노, 어머니 홍기숙. 열 살 위인 오빠 있음.
-1934년 아버지 별세. 어머니는 오빠만 데리고 서울로 떠남. 조부모와 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1938년 서울로 와서 살게 됨. 매동국민학교 입학.
-1944년 숙명여고 입학.
-1945년 소개령이 내려져 개성으로 이사, 호수돈여고로 전학. 고향에서 해방 맞음. 서울로 와 학교를 계속 다님. 여중 5학년 때 담임을 맡은 소설가 박노갑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음.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입학. 6월 초순에 입학식이 있어서 학교를 다닌 기간은 며칠 되지 않음.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가 죽고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됨. 미군 부대에 취직, 미8군 PX(동화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저리)의 초상화부에 근무. 여기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됨.
-1953년 호영진과 결혼. 1남 4녀를 둠.
-1970년 '나목'으로 '여성동아'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당선.
-이후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중앙문화대상(1993),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한무숙문학상(1995),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2000),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상(2006) 등을 수상.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음.
-2006년 서울대 명예문학박사학위 받음.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중 81세를 일기로 별세. 1월 24일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 추서 받음.

◆호원숙
1954년 서울에서 호영진 박완서의 맏딸로 태어났다. 경기여중고와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를 지냈다. 1992년 박완서 문학앨범에 일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썼다. 2006년 첫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냈다.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치울에 머물며 '박완서 소설 전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등을 출간하는 데 관여했다.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