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독 본사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6월 제작한 공공설치미술품 '가족인형'

서울 강남구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에서 테헤란로를 따라 강남역 방향으로 300m 정도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거대한 구조물 하나가 보인다. 빌딩과 빌딩 사이 공간에 설치된 이 구조물에는 커다랗고 파란 알약이 매달려 있다. 눈과 콧수염이 달린 알약의 모습이 성인 남성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 알약은 아버지다. 아버지 알약이 위아래로 쪼개지면 그 안에서 노란 얼굴의 어머니 알약이 나온다. 어머니 알약 속에는 주근깨 투성이의 꼬마 알약이 숨어있다. 꼬마 알약은 동생과 강아지 알약까지 품고 있다. 인형을 열면 새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는 듯 하다.

12m 크기 구조물에 매달린 이 알약 가족은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얼굴을 드러내고 감춘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직장인들도 조형물 앞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꺼내 자세를 취한다.

이제석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테헤란로의 명물’로 자리 잡은 이 구조물은 국내 제약사 한독이 지난해 6월 본사 빌딩 옆에 설치한 공공설치 미술품 ‘가족인형’이다. ‘광고 천재’로 불리는 이제석(33)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가 제작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그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단 3년간 광고계의 ‘루키’가 받을 수 있는 상을 싹쓸이했다.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뉴욕 윈쇼 페스티벌(최우수상), 광고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클리오 어워드(동상), 미국광고협회 애디 어워드(금상)를 비롯해 무려 50여개의 상을 받았다.

그의 이런 수상이력은 광고시장의 메카인 뉴욕에서 최대 광고회사만 골라서 옮겨 다닐 수 있게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주목을 받는 것은 그의 빛나는 창작 아이디어들이다.

이 대표는 주로 공익단체, 인권단체, 공공기관 등과 손잡고 일을 해왔다. 그를 광고계의 스타로 만든 작품도 대부분 여기서 나왔다. 군인의 총구가 전봇대를 감싸고 돌아 그 군인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반전(反戰)캠페인 포스터는 국내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가 영리조직인 제약업체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석 대표의 주요 작품. 반전 캠페인 '뿌린대로 거두리라'(왼쪽)와 학교폭력 예방 광고판 '누나만 믿어'

1954년 창립한 한독은 지난해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기념 이벤트를 고민하던 중 공공미술품 설치 아이디어가 나왔다. 테헤란로에 기업 이름이 드러나는 광고물을 설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도시 미관 개선 차원에서 옥외 공공미술품을 설치하는 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후 한독은 이 대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몇 차례 거절 의사를 밝히던 이 대표도 기업 홍보가 아닌 공공설치미술품 제작이란 점에 마음을 돌렸다.

이 대표는 “공익성과 예술성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그동안 기업과 일을 아예 안해온 것은 아니다”며 “이번에는 공익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진행한다고 해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독측은 이 대표에게 ‘가족의 건강’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면 무엇이든 만들어도 된다고 요청했다. 이 대표는 커다란 알약 캡슐을 제작해 본사 앞 인도에 세우거나 아예 빌딩 벽에 매달아 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작품 제작은 뜻대로 진행되진 않았다. 빌딩 앞 인도에 입체 구조물이 튀어나와 있으면 보행자를 방해할 수 있고, 강풍이 불어 떨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예산도 아이디어를 감당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큰 위기도 왔다.

“어느 날 회의 시간에 구조물 크기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왕 맡은 프로젝트이기에 구조물 크기 만큼은 절대로 양보하고 싶지 않았죠. 테헤란로 랜드마크를 만들자고 시작한 일인데 구조물 크기가 작아지면 그게 가능한가요?”

이 대표가 기지(機智)를 발휘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회의를 하던 도중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회의 참석자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이 대표를 쳐다봤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대 의사를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당시 회의에 동석했던 한독 관계자는 “이 대표가 갑자기 노래를 불러 당황했다”며 “하지만 이 대표가 프로젝트에 애정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곧 의도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작품의 크기를 유지하면서도 충분히 다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답답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이제석 대표의 주요 작품. '한해 6만명이 대기오염으로 사망합니다'(왼쪽)와 '독도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

결국 알약 가족은 원안대로 높이 12m를 유지하게 됐다. 대신에 입체 구조물이 아닌 평면에 알약을 그리기로 했다. 밋밋함을 없애기 위해 알약들을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했다. 결과적으로는 입체 구조물을 세우려 했던 당초 계획보다 더 괜찮은 작품이 탄생했다.

이 대표는 “예전부터 테헤란로에 대해 정말 멋없는 거리라고 생각했다”며 “알록달록 색을 입은 귀여운 알약들이 이 거리를 조금이나마 예술적으로 바꿔주길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업무에 찌들고 지친 인근 직장인들이 알약 가족을 보면서 잠시나마 웃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요즘 도시 건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라고 전했다.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역할을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만큼 그 안에서 본인의 역할을 찾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국내의 정치 지도자나 대기업 총수들이 공식 석상에서 웃는 얼굴로 장난을 치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는 날이 오길 꿈꾸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를 유쾌하고 재치있게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