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비런치(창업 경진대회) 행사장 내 VIP룸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 한 청년사업가의 눈에 들어왔다. 남성은 얼핏 봐도 일본인 같았다. 순간 이런 생각이 청년 사업가의 뇌리를 스쳤다. ‘중년의 일본인 남성이 이 행사에 와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벤처 투자가 같다.’

당시 청년은 거액의 투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대뜸 명함을 내밀고 말을 걸었다. 중년 남성은 과연 일본인이 맞았다. 벤처투자회사 CEO이기도 했다. 청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2~3분 간 우리 서비스를 소개할 기회를 달라”고 졸랐다. 처음엔 바쁘다며 거절하던 그는 청년이 소개한 서비스를 유심히 살펴본 뒤 물었다. “우리 회사는 10~50억원을 한번에 쏘는데, 투자 받을 생각이 있느냐”고.

그날 ‘돌격’의 주인공은 파이브락스를 창업한 청년사업가 이창수. 중년의 일본인 남성은 유리모토 야스히코 글로벌브레인 대표다. 파이브락스는 그 날 명함을 주고받은 인연으로 글로벌브레인으로부터 25억5000만원을 투자받았고 지난해 8월에는 미국 모바일 광고 업체 탭조이에 인수됐다. 약 1년만에 엑시트(투자금 회수)에 성공한 글로벌브레인은 파이브락스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공동 창업자인 노정석 CSO를 글로벌브레인 한국지사장으로 임명한 것.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창수 파이브락스 대표, 노정석 글로벌브레인 한국지사장, 유리모토 야스히코 글로벌브레인 대표, 스즈키 노부타케 글로벌브레인 국제 사업 플래닝 파트너, 시마즈 히로시 글로벌브레인 인큐베이션 비즈니스 파트너.

이창수·노정석 대표, 그리고 유리모토 대표를 한 자리에서 만나 창업과 투자 뒷얘기를 들어봤다. 유리모토 대표의 일본어 통역은 이 대표가 맡았다.

이창수= 유리모토 대표님과는 첫 만남부터 운이 좋았죠. 횡재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대표님이 다음날 다시 만나 마저 얘기하자고 하시길래 노 대표님을 급하게 불러서 부랴부랴 미팅을 준비했어요. 프리젠테이션 자료에는 뭘 추가하고 우리 회사 밸류에이션은 얼마로 잡아야 할 지 급하게 논의했죠.

유리모토= 사실 투자 받고 싶다며 갑자기 와서 명함부터 쓱 내미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렇게 적극적인 사람은 처음 봤죠. 얘기를 한번 잘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비스를 보고 나서는 꼭 투자해야 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졌어요. 다음날 만나서 약 2시간 정도 미팅하고, 1개월 정도 독점적으로 투자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던 걸로 기억해요(이창수 대표는 이 ‘제안’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5월 초 검토가 시작된 뒤 약 두 달이 채 안 돼서 25억5000만원 투자가 결정됐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일본 문화에 비춰볼 때 거의 드문 사례라고 벤처 투자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파이브락스의 두 창업자. 왼쪽부터 이창수 대표, 노정석 글로벌브레인 한국지사장.

일부 투자 업계 관계자들은 파이브락스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거금을 투자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창수 대표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노정석 대표의 ‘노하우’ 덕분이라고도 한다. 사실 노 대표는 파이브락스를 창업하기 전 4개 회사를 창업해 IPO·M&A로 엑시트한 경험이 있다. 다음과의 합자 회사인 ‘티스토리’를 창업한 주역으로도, 티켓몬스터·미미박스·눔·클럽베닛 등에 투자한 엔젤투자자로도 잘 알려져있다.

노= 구글 코리아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카이스트 후배이자 SK텔레콤에서 같이 일했던(노 대표는 1년, 이 대표는 4년 동안 SK텔레콤에 근무했는데, 두 사람 모두 윤송이 현 엔씨소프트 사장 밑에 있었다고 한다) 이 대표가 사업을 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길래 연락해서 끈질기게 꼬셨어요. 저랑 같이 사업하자고요. SK텔레콤에 다닐 때도 워낙 유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이= 대학교 4학년 때 도쿄공업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러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창업도 일본에서 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사업을 준비하며 만났던 한 투자자가 “다 좋은데 팀을 만들어오라”더군요. 현지에서 팀을 모으는 일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노 대표님에게 연락이 온 거에요. 그 때 노 대표님은 이미 유명인이었어요. 저는 일본에서 창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고민도 됐지만, 아무래도 혼자 사업하는 것보단 노 대표님과 같이 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해 한국에 돌아오게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