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아이폰 디자인을 책임지는 조너선 아이브 수석부사장, 삼성전자가 전격 영입한 디자인 전문가 이돈태 전무. 세계 양대(兩大) 스마트폰 업체의 디자인을 이끄는 두 사람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국의 유명 디자인 컨설팅 업체 탠저린(Tangerine) 출신이라는 점이다. 아이브 수석부사장은 탠저린 창업 초기에 일했고, 이 전무는 공동 대표이사까지 맡았다가 최근 삼성전자로 스카우트됐다.

지난 9일 신도리코를 방문하기 위해 방한(訪韓)한 탠저린의 마틴 다비셔(Darbyshire)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탠저린의 성공 비결은 단순히 예쁜(pretty)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품·산업·소비자의 특성을 모두 고려해 장점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외적 美보다 사용자 경험이 중요

1989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탠저린은 유럽 5대 디자인 컨설팅 기업 중 하나다. 디자이너가 21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회사이지만 영국항공·니콘·샤프 등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면서 혁신적인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서비스를 만들어왔다. 다비셔 CEO는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글로벌 디자인 업체인 아이디오(IDEO)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1989년 창업했다. 그는 현재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디자인어워드에서 18년간 제품 디자인 부문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다비셔 CEO는 "디자인의 핵심은 해당 기업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오랜 기간 파악하고 분석해내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소비자 경험(user experience)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틴 다비셔 탠저린 CEO는“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뛰어난 디자인의 제품이 나오는 전시회를 관람하기보다 다양한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문화를 체험하라”고 조언했다.

이런 철학이 잘 반영된 디자인이 영국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다. 탠저린은 항상 같은 방향을 봐야 한다는 비행기 좌석 인테리어의 고정관념을 깨고 좌석 2개를 'S자' 형태로 마주보게 설치했다. 앞·뒤 좌석 간 거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승객들이 180도로 좌석을 펴서 편하게 누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영국항공은 2000년 이렇게 좌석을 바꾼 이후 매출이 연평균 8000억원 이상 늘었다.

그는 "소비자가 제품·서비스를 사용하는 맥락(context)을 파악하고 여기에 가장 최적화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탠저린은 예술작품과 에어컨을 결합한 형태로 주목받았던 LG전자의 '아트쿨' 에어컨, 신도리코의 프린터기 디자인도 담당했다.

틀을 깨는 혁신은 디자인을 통해

다비셔 CEO는 "디자인은 기존 산업에 익숙해진 기업의 틀을 깨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특정 산업에서 오랫동안 우월적 지위를 누린 기업일수록 그 틀을 벗어나기 힘든데 디자인이 그것을 깨고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열차는 왜 무조건 두 명씩 앉는 좌석이 있어야 하고, 승객이 바라보는 방향은 항상 같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기존 제품·서비스와 같아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은 디자인을 통해 부숴야 한다"며 "이를 통해 기업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이익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이런 트렌드는 IT(정보기술) 산업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했다. 다비셔 CEO는 "스마트폰 등 IT산업에서는 모든 제품의 기능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간 상황"이라며 "여기서 새로운 가치를 주는 것은 디자인뿐"이라고 말했다. 디자인을 통해 제품이 가진 명확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소비자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이 이런 장점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다른 회사 디자인 베낄 시간에 여행을 하라

최근 미국 CES, 스페인 MWC 같은 세계적인 전자제품 전시회에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들이 대거 출시된다. 하지만 다비셔 CEO는 "굳이 그런 전시회에서 다른 업체들의 디자인을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히려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유럽·북미·남미 등 다양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그 나라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