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파동이 ‘증세 없는 복지’ 논란으로 번지면서 복지를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감당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눈 먼 돈이 많다. 정부 예산이나 기금 지출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국민의 세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세금을 더 걷거나 복지를 축소하기 전에 이런 눈 먼 돈부터 없애는 게 순서다.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눈 먼 돈의 실태를 파악해 봤다. 이번 ‘[눈먼 돈] 시리즈’는 이번이 시즌1이다. ‘[눈먼 돈-1]’로 표현했다. 앞으로 시즌2, 시즌3 등으로 계속 이어진다. [편집자주]


서울에서 중소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모씨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진흥개발기금에서 1억5000만원을 연 2% 금리로 대출 받았다. 정부는 작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여행업이 급속도록 위축되자 6월부터 9월까지 여행업, 호텔업, 휴양업, 관광유람선업, 유원시설업 등 관광사업체에 특별융자 형식으로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이씨는 "당시 사업이 약간 위축되긴 했지만 급한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출 안 받으면 바보'라는 말을 듣고 대출을 신청했다"며 "이번에는 기존 융자 잔액과 상관 없이 빌려주는 거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최대 한도까지 빌린 다음 연 5%짜리 회사채에 투자해 연간 3%, 약 450만원의 금리차익을 누리고 있다. 그는 "서울시 관광협회에 융자 신청서를 내니 사업체 한번 둘러 보고 회계 장부 좀 살펴보고 바로 대출을 해줬다"며 "돈을 어떻게 썼는지 따로 검사를 나온 적은 없다"고 밝혔다.

◆ 기금은 눈먼 돈…먼저 신청하는 사람이 임자

기금은 정부가 특정 사업 등을 위해 예산 외에 개별법에 따라 설치하는 자금으로 정부 출연금과 개인, 기업에 물리는 부담금으로 구성된다. 해외 여행객이 비행기를 이용해 출국할 때 내는 출국납부금 1만원이 관광진흥개발기금에, 영화관 입장료의 3%가 영화발전기금으로 적립되는 식이다.

기금의 종류는 관광진흥개발기금, 국민주택기금 등 64개로 지난해 운용 규모는 515조원에 달한다. 기금액 중 상당 부분은 국민이 낸 돈으로 조성되는데 관리는 세금이나 예산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하다.

작년에 관광진흥개발기금에서 세월호 특별융자를 받은 기업은 이씨의 여행사를 포함해 373개다. 대출 규모는 총 377억원. 문체부는 작년 7월엔 403개 기업에 약 2700억원을 '정기 융자'로 지원했고 이후 3개월 뒤인 10월엔 '긴급 융자'란 이름으로 920억원을 또 빌려주려고 했다.

연 대출금리가 2~3%대인 세월호 특별융자와 정기 융자, 긴급 융자는 한 업체가 중복해서 받을 수 있고 대출금을 어디에 썼는지는 나중에 결산서를 통해 적당히 제출하면 된다. 대출금을 용도 외의 목적으로 쓰다가 적발되면 상환해야 하지만 이듬 해에 다시 신청해 대출 받을 수 있다.

실업급여 지급 등으로 쓰이는 고용노동부의 고용보험기금도 부정수급이 끊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3년 8월까지 부정으로 지급된 고용보험기금은 680억원에 달했다.

농업협동조합 중앙회는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을 부실하게 관리하다가 2009년 초 감사원에 적발됐다. 이 기금은 담보 능력이 부족한 농림수산업자에게 보증을 제공해 이들이 대출을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농림수산업을 주업으로 한다고 보기 어려운 1450명에게 490억8500만원을 보증해줬다.


◆ 형식적 사후 평가에 제제도 미흡…"기금, 통폐합 해야"

각 부처는 정부 출연금과 국민이 낸 돈 등으로 조성된 기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매년 자체적으로 평가한다.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의 평가 결과를 재점검한다. 하지만 지금의 평가방식은 기금이 처음 계획한 규모와 비슷하게 집행이 됐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필요한 곳에 제대로 집행이 됐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기재부의 '2012년도 기금운용평가보고서'에 따르면 41개 기금의 139개 사업 중 22개가 '미흡'(100점 만점 중 50~60점) 판정을 받았고 19개는 '매우 미흡'(50점 이하) 판정을 받았다. 2013년도 기금운용평가에서는 39개 기금의 108개 사업 중 미흡이 16개, '매우 미흡'이 10개였다.

평가 결과가 '미흡' 이하인 사업은 다음 해 예산을 원칙적으로 10% 이상 줄여야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고용보험기금 중 '실업자 및 근로자 능력개발 지원' 사업은 2012년에 미흡 판정을 받았다. 당시 사업규모는 3111억원. 미흡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2013년엔 예산이 원칙적으로 2800억원 이하로 줄어야 했지만 2013년에도 3075억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고용보험기금 사업 중 '능력개발 융자 지원'도 2012년에 '미흡' 평가를 받았지만 예산은 2012년 969억원에서 2013년 966억원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전문가들은 기금이 처음 만들어진 후로 경제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기금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고 불필요한 기금은 통폐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원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공공기관연구센터 소장은 "과거 고도 성장기에 금리가 높을 때는 정부가 기금을 별도 장부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는 기금을 따로 운영할 이유가 없다"며 "나라는 돈이 필요해 국채를 발행하는데 (수백조원을) 은행에 맡겨 놓고 이자 사업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또 "기금 중 일부는 부처가 재량껏 쓸 수 있기 때문에 부처가 권한으로 인식한다"며 "단위 사업별로 하나씩 들여다 보고 불필요한 기금은 통폐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신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점검하려면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며 "어떤 기금의 수요가 늘고, 어떤 기금의 수요가 줄었는지 전반적으로 재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