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업체 뱅크샐러드는 지난해 국내 10개 카드사의 2100가지 혜택을 분석한 뒤, 고객별 소비 패턴에 따라 최적의 카드를 추천하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그러나 금융상품을 추천하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 사업 모델은 금융 당국의 규제에 막혔다.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르면 카드 모집인은 1개 카드사 상품만 취급할 수 있는데, 뱅크샐러드는 10개 카드사의 상품을 중개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므로 사업자 등록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뱅크샐러드 김태훈 대표는 "지난해 7월 상품 개발을 마쳤지만 당국 규제로 시판되지 못했다"며 "인터넷을 통한 보험 판매는 가능한데, 왜 카드는 안 되는가"라고 하소연했다.

IT와 금융을 결합한 핀테크 서비스가 지난 2년간 100여개 만들어졌지만, 국민에겐 '그림의 떡'이다. 상당수 업체가 사업 등록조차 받지 못했다. 기존 산업의 장벽을 파괴하며 혁신적인 기술을 내놓는 핀테크 업체들의 진화 속도를 후진적인 정부 규제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대로는 한국의 알리바바가 나오기 어렵다"며 "규제 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발상 전환이 없으면 핀테크 생태계를 만들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거미줄처럼 얽힌 규제 풀다가 해외 경쟁 업체에 뒤처져

가장 큰 문제는 '규제 철학'이다. 우리나라는 규제를 나열해두고, 일일이 사전에 승인받도록 하는 '포지티브형(나열주의)' 시스템이다. 이 때문에 핀테크 업체들이 지켜야 하는 규제 리스트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미래창조과학부 등 정부 부처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예컨대 금감원의 '전자금융감독규정해설'은 366페이지 분량에 지켜야 하는 규제가 수천건에 달한다. A핀테크 업체 대표는 "한 가지 이슈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재심사를 수개월에서 수년 기다려야 한다"며 "그동안 이미 해외에서 우리 서비스를 모방하거나 앞서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유럽 등은 일부 원칙만 지키면 되는 네거티브형 규제를 채택하고 있다. 규제로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회사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다.

규제가 많으면 예외적으로 사업을 허용하는 '유권해석'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인색하기만 하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지난 14년간 정부가 기업에서 제기한 문제에 유권해석을 내려준 건 12차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증권위원회와 선물위원회가 기업들에 내린 유권해석은 작년 1년 동안만 135건에 달했다.

◇스타트업에 수십억 자본금 요구

새로운 기술이 있어도 사업등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보안규정에 발목 잡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자본금 규제다. 전자금융업을 하려면 자본금을 10억~50억원 마련해야 하는데, 직원 3~4명인 초창기 스타트업들은 "중견업체들에나 적용되는 규제"라고 항변한다.

미국의 대표 벤처 캐피털 회사 DFJ에서 40만달러를 투자받은 비트코인 업체 코인플러그는 국내 디지털 화폐 시장을 키울 꿈을 갖고 있지만,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송금과 결제가 가능한 전자금융업자로 등록하려면 30억이 필요한데, 자본금이 7억8000만원에 그쳐 5억원 이상이면 사업할 수 있는 통신판매업자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신판매업자는 은행·카드사 등 금융회사와 제휴해 송금·결제 사업을 할 수 없다. 핀테크 선진국인 영국의 경우 월 자금 거래량이 300만달러 이하이면 자본금 규제를 하지 않는다. 미국도 최근 뉴욕 금융당국이 비트코인 사업자에 대해 자본금이 없어도 일정 기간 사업할 수 있게 허용했다.

◇공인인증서 관리 기관, 정부 빼고도 5곳

핀테크 규제 기관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의사결정 효율성도 떨어진다. 현재 소비자들은 인터넷 쇼핑 결제에서 공인인증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전자결제를 관장하는 금융위원회가 공인인증서 의무화 조항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뱅킹의 송금·이체에선 여전히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한다. 이 분야는 미래창조과학부 소관인데 아직도 공인인증서 의무화 조항을 없애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승주 고려대 교수는 "공인인증서 관리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인터넷진흥원·한국전자인증 등 5개 기관도 참여하는데, 업무가 중복되고 의사결정이 비효율적이라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을 카드에 대기만 해도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보안기술들이 줄줄이 출시됐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규제 시스템, 뜯어고쳐야

핀테크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규제 중 하나로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소유 규제(금산분리)가 손꼽힌다. 현재 우리나라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의 4%까지밖에 소유할 수 없지만, 일본이나 미국은 20%가 넘는다. 다음카카오·네이버 같은 국내 대표 IT기업들도 핀테크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금산분리 조항 때문에 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영환 건국대 IT금융학과 교수는 "스크린쿼터를 폐지한 2006년 이후 오히려 한국 영화가 경쟁력이 생겨 한류 붐을 주도한 것처럼, 금산분리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핀테크란?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ique)의 합성어다. 인터넷·모바일 공간에서 결제·송금·이체, 인터넷 전문 은행, 크라우드 펀딩, 디지털 화폐 등 각종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을 뜻한다. 중국 IT 기업 알리바바가 온라인 전용 대출·투자상품 등을 출시하고, 애플이 쇼핑몰에서 아이폰을 신용카드처럼 쓸 수 있게 만든 '애플페이'를 선보인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