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한국 현대사의 아이콘이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 같다. 등장하는 장면장면들이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보여준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조우하는 것도 별미다. 너무 심각해진다 싶은 지점에서 등장해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디자이너 앙드레 김, 씨름선수 이만기, 가수 남진 등이 그렇다. 영화 속 유명인들의 모습,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 국제시장에 트럭 몰고 나타난 정주영 회장

국제시장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어린 덕수와 달구

부산 국제시장에서 구두를 닦던 어린 주인공 덕수와 달구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 와 이 땅에 조선소를 짓겠다”고 말하는 젊은 사업가를 만난다.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마른 땅에서 어떻게 배를 만들 거냐”고 묻는 어린 주인공들. 청년 정주영은 “우리나라에서 넓은 땅을 산 뒤 그 사진을 외국인에게 보여주는 거야. 당신이 필요한 큰 배를 여기서 만들어주겠다고 한 다음, 배를 만들어서 파는 거지”라고 답한다.

“미친 것 아냐. 어떻게 배를 만들어? 아예 국산 자동차를 만든다고 하지”라고 쫑알대는 주인공들을 뒤로 하고, 그는 ‘현대 건설’ 이름이 선명한 트럭을 타고 퇴장한다.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정 회장이 영화 속에서 어린 주인공들에게 풀어놓은 사업 구상은 실제로 1970년말에 실현됐다. 최근 출간된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정주영: 이봐, 해봤어?’에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나온다.

“정작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 조선소 착공 첫삽을 뜬 것은 1972년 3월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황당해 보이는 사업 계획서와 아직 매입도 안된 조선소 예정 부지인 황량한 해변 사진. 정 회장이 조선소 사업 추진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전부였다. 당시로서는 우여곡절 끝에 조선소를 짓는다 해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기술 후진국 한국에서 만든 배를 외국 선주들이 사주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꿈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고 ‘황당한’ 계획을 현실로 이뤄냈다. 조선소 땅 매입도 안 되어 있고, 착공도 안 된 1970년 12월에 정 회장 자신보다 ‘더 미친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배를 두 척이나 주문 받았다.”

◆ ‘꽃분이네’에서 옷감 고르던 앙드레 김

국내 1호 남성 패션디자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한 故 앙드레김

덕수네 고모의 가게 ‘꽃분이네’에 머리를 곱게 빗은 젊은 남자가 달구의 손에 이끌려 나타난다. 여자 옷을 만들겠다며 새로운 옷감을 찾던 중이다. “다가오는 시대엔 여자도 남자의 일을 하고 남자도 여자의 일을 하게 될 거예요”라며 “오우 패브릭(fabric)”을 외친다. 누가 봐도 앙드레김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로 한 시대를 수놓은 사람이다. 덕수 어머니가 옷 소매에 놓은 수 문양을 보고 “오~ 판타스틱!”을 연발한 그는 영감을 얻었다는 듯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실제로 앙드레김은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는 지금의 서울 은평구였지만, 중학교 때 6·25가 나면서 부산으로 피난 갔고, 그곳에서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와 의상을 보며 패션 디자인의 꿈을 키웠다.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그는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뒤였다”고 썼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홀로 서울로 올라온 그는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하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최경자가 1961년 국제복장학원을 세웠을 때 1기생으로 입학했다.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고 한국 최초 남성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데뷔했다. 1966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며 한국 패션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 먹던 무학초등학교 씨름부 이만기

경남대학교 대학생이던 이만기는 1983년 4월 초대 천하장사에 이어 10월 한라장사에 오르며 씨름 열기를 몰고 왔다.

영화 속 주인공 덕수와 달구가 꼼장어를 먹는 장면에서, 덩치 좋은 운동부 학생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유독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는 꼬마가 있다. ‘마산 무학초등학교 5학년생’ 이만기다. 학생들의 먹성에 핀잔을 주려던 달수를 두고 험상궃은 눈빛과 대꾸로 기선을 제압한다.

"무슨 운동 하냐?"
"씨름이요."

그 후 덕수는 파독 광부로 일하고 돌아온 뒤 TV에서 민속씨름 천하장사 결정전을 보고 외친다. “이만기 만세!”

‘모래판의 제왕’ 이만기는 1980년대 민속씨름의 전성기를 이끈 스포츠 스타였다.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열 차례나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실제로 이만기는 무학초등학교에서 씨름을 시작했고,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영화 속 어린 이만기는 덩치 좋은 학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학생 시절에도 몸무게는 42킬로그램밖에 안됐다. 체구가 작아 씨름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중학교 2, 3학년이 되면서 키가 8센티미터, 10센티미터씩 자란 덕분에 다시 씨름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 베트남전 자원입대하고도 인기 누린 가수 남진

영화 속에서 베트남에 기술근로자로 파견 간 달수와 달구는 참전 가수 남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영화에서 덕수는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 기술근로자로 자원해 간다. 그곳에서 해병대로 파병된 가수 남진을 만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다. 남진은 그때 자신이 귀국한 뒤에 발표할 신곡이라며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흥얼거린다. 어디까지 사실일까?

남진은 실제로 인기가 한창이던 때에 해병대로 자원 입대했다. 그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자체가 대대적인 뉴스였다. 그가 입대한 것은 본인의 희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수들이 병역으로 인한 경력 단절 때문에 기피하는 편이지만, 당시 남진의 인기는 입대 후에도 식을 줄 몰랐다. 선데이서울이나 다른 대중매체에서 가요 순위 조사를 하면 남진이 1위를 휩쓸었다. 당시 다른 가수나 연예인들이 월남전 위문 공연은 많이 갔지만 남자 가수가 자진 입대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남진은 입대 후에도 휴가 중에 나와서 틈틈이 신곡을 발표하며 최고의 인기를 이어갔다.

다만 참전 시기는 영화 속 장면과 다르다. 영화 속 덕수는 1974년에 베트남으로 가서 1975년쯤 남진을 만나지만, 실제로 남진은 1969년에 참전해 1971년에 전역했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서 철수한 것은 1973년이었다.

가수 남진

‘님과 함께’를 전쟁터에서 흥얼거리는 장면도 영화 속의 허구다. 남진이 그 노래를 접한 것은 베트남전 참전 이후의 일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그전까지 남진은 그 노래를 몰랐다. 아마 그 노래가 남진의 대표곡인데다 최근에 김범수가 다시 불러서 인기를 끌고 하니까 일부러 이야기를 설정해서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임진모에 따르면, 작곡가 남국인 선생이 곡을 다 써 놓은 뒤에 남진에게 부르게 하려 했는데, 제대 후에도 워낙 바빠 연락이 닿지 못했다는 것. 당시 남진은 ‘목포 아가씨’, ‘아랫마을 이쁜이’ 등을 발표하며 인기몰이가 한창이었다. 임진모는 “‘님과 함께’ 노래가 음반으로 나온 것은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장이 중간에 다리를 놓아서 성사됐다”고 했다.

◆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산 가족 찾기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덕수

그밖에 영화 국제시장에는 KBS 이산가족 찾기 행사가 나온다. 그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곡이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다. 하지만 원래 이 노래는 패티김의 노래가 아니다. 1964년 드라마 ‘남과 북’의 주제가로 가수 곽선옥이 불렀던 노래인데,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는 곽순옥이 홍콩으로 간 뒤여서, 그의 동료이기도 했던 패티김이 부른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때 배경음악으로 쓰인 또다른 대표곡으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있었다. 그때 설운도는 신인 가수였는데 그 노래로 입지를 굳혔다고 임진모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