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TV 사업을 세계 1등으로 만든 제품은 ‘보르도TV’다. 2006년 출시된 보르도TV는 와인잔 모양의 외관에, 화면 테두리는 검정색·와인색 두 가지 색상의 플라스틱으로 감싼 게 특징이다. 접착제로 이어 붙이지 않은 하나의 플라스틱이 동시에 두 가지 색상을 낼 수 있던 것은 ‘이중 사출’이라는 기법 덕이다. 이중 사출은 두 가지 재질이나 빛깔의 플라스틱을 맞대어 동시에 성형하는 것으로 ‘뿌리기술’ 중 하나인 금형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수백만원짜리 액정표시장치(LCD) TV도 1만원짜리 플라스틱 없이는 ‘명품’이 될 수 없다. 이처럼 뿌리기술은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가 독일·일본·미국을 넘어서려면 6대 뿌리기술인 주조·금형·소성·용접·표면처리·열처리 기술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6대 뿌리산업의 현황을 짚어보고 향후 발전 방향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한국로스트왁스는 정밀 주조(鑄造) 업계 기린아다. 이 회사가 '로스트왁스(용어설명 참조)' 주조 기술로 생산한 부품은 미국 보잉과 유럽 에어버스가 앞다퉈 구매해 간다. 보잉의 747, 767, 777 기종과 에어버스의 A300, A310, MD-11기 엔진에 한국로스트왁스의 주조 부품이 탑재돼 있다.

한국로스트왁스의 정밀 주조기술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으로부터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인증을 받았다. 미국 방위산업체 록히드마틴도 이 회사에 제조 및 품질보증 인증을 부여했다.

◆ 쏘나타 2500만원 중 250만원은 주조 부품

주조는 완제품 형태의 틀에 쇳물을 부어 굳히는 기술이다. 주조 공장에서 근로자가 쇳물을 형틀에 붓고 있다.

주조는 금속 제품을 특정한 형태로 대량 생산하는데 필요한 뿌리기술이다. 주조 기술을 이해하려면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떠올리면 된다. 특정 형태의 플라스틱 틀에 액체 초콜릿을 부어 놓으면, 시간이 지난 뒤 틀과 동일한 모양의 초콜릿을 만들 수 있다. 주조 역시 완제품 모양의 틀에 끓인 쇳물을 부어 굳힌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

주조 기술이 국내 제조업 경쟁력에 특히 중요한 것은 주요 수출품에 주조 기술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5대 수출품 중 하나인 자동차의 경우, 주조 부품이 총 무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2012년 기준)다. 자동차 1대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0%에 이른다. 현대자동차쏘나타 1대 가격이 대략 2500만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250만원은 주조로 생산된 부품 몫이다.

자동차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 LCD TV 등 전자제품도 내부에 금속으로 된 부품은 대부분 주조를 통해 생산된다. 조선 산업의 핵심인 엔진 부품 역시 주조 기술 없이는 생산할 수 없다.

◆ 미국·독일·일본에 양(量)과 질(質) 모두 뒤져

주조가 제조업의 핵심 기술이지만 국내 주조 산업의 현주소는 제조업 선진국에 크게 뒤진다. 2012년 기준 국내 주물 생산량은 244만톤으로 세계 8위다. 제조업 경쟁국인 미국·독일·일본이 각각 2위, 5위, 6위를 차지한 것과 비교하면 갈길이 멀다.

자동차 생산에는 주조 기술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특히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은 첨단 주조 기술의 집약체다.

주조 공장 1개당 주물 생산량을 나타내는 주물 생산성 순위도 8위다. 이 분야에서 독일·미국·프랑스·러시아·일본이 나란히 1~5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물 생산량만을 놓고 보면 세계 1위는 중국으로 2008년에 이미 3350만톤을 생산했다. 우리나라의 10배가 넘는다. 그러나 중국에는 주물공장이 2만6000여개나 난립해 주물 생산성은 세계 10위에 머물러 있다.

국내 주조 산업 생태계 기반 역시 취약하다. 900여개 주조 업체의 80% 이상은 종업원 100인 미만의 중소기업이다. 대부분이 대기업의 2~4차 협력사로 등록돼 있다.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기술 투자 여력이 적고, 대기업과 납품 단가 협상에도 불리하다.

◆ 친환경, 저에너지 기술 개발이 열쇠

뿌리산업 전문가들은 국내 주조 산업이 선진국 대비 영세한 원인으로 에너지 문제에 대한 투자 부진과 기술인력 부족 등을 꼽는다.

주조는 고철을 녹여 쇳물을 붓는 공정이 핵심이다. 쇳물을 만드는데는 전기에너지를 열로 바꿔주는 전기로를 사용한다. 이 용해 과정에서 다량의 전기 에너지가 사용된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주조 산업의 용해원단위(주물 1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전기 에너지)는 800㎾h/톤이다. 일본의 580~600㎾h/톤에 비해 30% 이상 높다.

쇳물을 만드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같은 제품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단가도 비싸다. 900여개 업체가 1년에 치르는 전기요금만 4000억~5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상목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저에너지 주조 기술 개발을 통해 향후 600억원~800억원 정도의 전기요금을 절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며 “통상 에너지 사용량이 많을수록 제품 특성 역시 나빠진다는 점에서 저에너지 주조 기술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내서는 주조 산업이 3D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때문에 우수 인력 유치가 쉽지 않다. 선진국들은 국가적 지원을 통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다른 제조업종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기술인력 부족 현상은 주조 업계 고질병이다. 주조 산업이 ‘3D’ 산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보니 신규 인력 유입이 적다. 주조 공장에 필요한 인력은 크게 기술·기능·노무·행정 4개 분야로 나뉘는데 특히 기술·기능 인력이 부족하다.

뿌리산업 선진국들은 국가 정책 지원을 통해 인력 양성 문제를 해결한다. 독일은 2006년 ‘독일 하이테크 전략’을 수립하고, 10개 뿌리산업 클러스터를 운영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 뿌리산업에 대한 인식이 3D 업종에서 ‘ACE(Automatic, Clean, Easy) 업종’으로 바뀌었다. 일본 역시 2005년 ‘모노즈쿠리(ものつくり) 국가비전 전략’을 수립해 정부 차원에서 각 업체에 설비지원·설계·구매·생산·판매까지 전방위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모노즈쿠리는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한 일본 제조업을 비유하는 말로, 일본은 이 정책을 통해 제조업 근간(뿌리) 기술 20개를 지원하고 있다.

이상목 수석연구원은 “독일은 뿌리기술 숙련자에게 정부가 지원금을 제공하는 등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뿌리기술이 전체 제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국가 차원의 인식에서 출발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용어설명

로스트왁스(Lost Wax) 주조: 인공 왁스(밀랍)로 최종 완제품 형상을 만들고, 이를 석고로 감싼 뒤 불에 굽는다. 이 과정에서 열을 가한 석고가 단단히 굳는 반면, 내부의 왁스는 녹아서 빠져 나간다. 석고에 쇳물을 넣으면 애초에 왁스가 있던 부분에 쇳물이 침투해 금속의 완제품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