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이 국내 제약사 중 처음으로 매출액 1조원을 돌파했다. 창립 88년 만의 일이다.

유한양행(000100)이 이달 19일을 기점으로 매출액이 1조100억원을 돌파했다. 120여년 전 한국에서 제약산업이 시작된 이래 국내 제약업체가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건 처음이다.

유한양행은 1926년 12월 서울 종로2가 덕원빌딩에서 고(故) 유일한 박사에 의해 탄생했다. 처음에는 진통소염제 ‘안티플라민’과 결핵약, 염색약, 화장품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다가 1957년 미국 제약업체인 사이나미드사와 기술 제휴를 맺으면서 제대로 된 제약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번에 매출액 1조원을 넘어서기까지는 88년이 걸렸다.

지난 40여년 동안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던 동아제약의 경우 2012년 931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기대감을 높였으나 지난해 회사가 분할되는 바람에 ‘1조원 클럽’ 입성이 무산됐다. 이후 유한양행과 녹십자(006280)중 한 곳이 1조원 고지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녹십자는 올해 매출 1조원 돌파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약업계는 유한양행의 이번 성과가 가진 상징성이 크다고 말한다. 전 세계 10위 규모의 제약시장을 갖추고도 지금까지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회사가 나오지 않아 국내 시장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재국 한국제약협회 상무는 “삼성, SK 등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하면 매출 1조원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며 “하지만 국내 제약사들이 글로벌 제약사들과 맞서 싸울 기초체력을 꾸준히 키우고 있다는 증거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가치 있는 결과인 건 맞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고 말한다. 매출액은 높지만 영업이익율은 낮은 사업 구조에다 획기적인 신약을 개발한 상황도 아니라 매출 1조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전경

실제로 유한양행은 매출의 상당 부분을 다국적 제약사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들여온 블록버스터급 신약에서 얻고 있다. 베링거인겔하임의 고혈압치료제 ‘트윈스타’와 당뇨병치료제 ‘트라젠타’, 길리어드의 B형간염치료제 ‘비리어드’ 등 3개 품목의 매출 비중만 따져도 전체의 25%에 이른다.

화이자의 폐렴구균백신 ‘프리베나’, 아스트라제네카의 고지혈증치료제 ‘크레스토’, 베링거인겔하임의 항응고제 ‘프라닥사’ 등 굵직한 의약품도 모두 유한양행이 판매대행을 하고 있다.

도입상품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다보니 매출액에 비해 영업이익 규모가 작을 수 밖에 없다. 유한양행은 올해 3분기 2591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9% 증가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134억원으로 4.4% 증가하는데 그쳤다. 성과급 50억원을 지급하느라 영업이익율이 낮아졌지만 매출의 50% 이상을 도입상품에 의존한 점도 영업이익을 떨어뜨린 이유로 평가된다.

미래에셋증권은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인건비 상승과 추가 공동 마케팅 품목 도입에 따른 마케팅 비용 등이 늘면서 전문의약품 사업부의 이익률은 당초 예상보다 크게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자체 신약이 없다는 점도 회사의 장기적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한양행은 2005년 위궤양약 ‘레바넥스’를 개발해 국산신약 9호로 허가받았다. 그러나 레바넥스는 판매가 부진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그나마 제네릭(복제약)으로 개발한 고지혈증치료제 ‘아토르바’가 3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한 국내 제약사 임원은 “다국적 제약사와의 관계가 천년만년 가면 다행이지만 그 회사들이 전략을 바꿔 다른 국내 제약사와 손을 잡으면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며 “유한양행의 이번 ‘1조원 클럽’ 입성이 정말 빛을 보려면 신약 개발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