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 경제부장

#1.
"회사가 전쟁터라고…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오상식 과장의 선배)
"전쟁하러 가봐야할 거 같습니다"(오상식 과장)
"그래 그럼 나는 지옥으로 돌아가봐야지"(오상식 과장의 선배)
요즘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다. 최근 송년회를 겸한 저녁 모임에서 만난 한 지인은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의 현주소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장면"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또다른 지인은 "지금은 버티는 게 최선이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 자리에선 드라마 내용을 잘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그 이후 이 장면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나서 뒤늦게 쓴웃음을 지었다.

#2.
"지금 젊은이들의 취업 전선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보다 나을 게 없어요. 특히 문과 출신들은 그 때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면 됩니다"
또다른 송년 모임에서 한 후배는 "체감실업률이 10%를 넘어선 게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니다"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S그룹의 한 계열사에서 인사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푸념이야 어느 술자리에서나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올연말 사적인 송년모임 자리는 예년과 좀 많이 달랐다. 제각기 사정은 달랐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온통 짓누르고 있는 분위기랄까. 희망과 덕담 보다는 걱정과 한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적인 ‘기대심리’는 어느덧 사라지고 불안감에 휩싸인 ‘우려심리’가 우리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었다.

최근 국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디플레이션 논쟁’도 이런 모습들과 무관치 않다. 정부의 경제정책 ‘씽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년 넘게 저물가가 이어진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1990년대 디플레이션에 빠지기 전 일본 경제와 닮은 꼴이라며 기준금리 인하에 미온적인 한국은행에 직격탄을 날리면서 이번 논쟁은 시작됐다. 한국은행은 지금의 저물가는 유가 등 공급 가격 하락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에 KDI의 디플레이션 우려는 과도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두 기관이 벌이고 있는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은 논외로 치더라도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임에 틀림없다. 흔히 디플레이션은 저혈압, 인플레이션은 고혈압에 비유한다.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 보다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한 번 걸리면 고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통화가치가 떨어져 ‘내일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로 인해 ‘오늘의 소비’를 촉진시켜 경제를 과열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반대로 디플레이션은 ‘내일의 가격’이 떨어질 것이 자명하니 ‘오늘의 소비’를 계속 미루도록 해 심각한 장기 경기침체를 낳는다.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 20년 넘게 허우적거리고 있는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디플레이션은 곧 절망이요 암흑시대다. ‘민간소비 축소→기업투자 축소→일자리 감소→소득 감소’의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사회는 활력을 잃고 비관적인 인식만 자리잡는 게 디플레이션의 최대 병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디플레이션 ‘우려심리’를 반드시 차단해 걷어내야 하는 이유다. 경제에서 ‘기대 또는 우려심리’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경제주체들에 퍼져있는 ‘기대 또는 우려심리’는 그대로 놔두면 그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는 특성을 갖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 방향으로 치솟아 비등점(끓는점)을 넘거나, 반대 방향으로 곤두박질쳐 빙점(어는점) 밑으로 내려가면 ‘백약이 무효’인 혼돈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디플레이션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다. 일본이 나라 곳간과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마구 푸는 ‘아베노믹스’라는 비정상적인 경제정책을 써서라도 경제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경제정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섯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정부와 한국은행은 선언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디플레이션 리스크는 온 몸을 던져 막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최악의 상황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며 그런 상황은 방치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천명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에겐 정부와 한국은행이 있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둘째, 고성장 인플레이션 시대가 지났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는데 머무는 게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맞는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지금이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할 시기인지 묻고 싶다. 디플레이션을 막는데 정책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재정은 확장적으로 가고 기준금리는 내리는 게 맞다. 대대적인 규제완화는 말의 성찬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셋째, 유연한 마인드가 절실하다. 우리 사회는 싸움에서 지면 끝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있다. 흔히 말하는 ‘올(all) 오어(or) 낫씽(nothing)’의 논리다. 과연 우리 세상이 그러한가. 정책을 시행하고 문제가 있으면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

넷째, 인기영합적인 ‘대증요법’은 필패(必敗)의 전주곡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려 돈을 푼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기서 그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가계부채 등 후유증 밖에 없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구조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그 지름길은 고부가가치 내수산업 육성이다. 제2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가 나올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수출만으로 먹고 사는 시기는 지났다. 무엇보다 글로벌 저성장 시대라는 대외 환경이 우리 수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유로존은 디플레이션 공포에 휩싸여 있고, 중동 산유국은 유가 급락으로 위축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중국의 성장률 둔화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기댈 언덕이 별로 없다. 서비스산업 등 새 시장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새 버팀목이 필요하다. 수출과 내수가 균형을 맞추는 성장으로 가야 한다.

다섯째, 매년 되풀이되고 있는 해결 과제를 하나씩 매듭지어 모범사례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칼에 해결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저성장 저물가 고령화 등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낱낱이 알면서도 싸움만 하고 아무 것도 결론짓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죄악이다. 타협을 통해 한발짝이라도 전진할 수 있어야 한다. 부동산법도 그렇고, 서비스선진화법도 빠른 시일내 결론을 짓고 가야 한다.

김주형 LG경제연구원장은 우리 사회의 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대외 환경을 얘기하지만 정작 위기의 근원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백번천번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