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을 하청받아 만드는 A중소기업 사장 김모씨는 올해 초 패션 기업 에스콰이아(법인 이름 'EFC')에 물건을 만들어 납품했다. 그는 물품 대금 1억1000만원을 '외상매출채권 담보 대출'(외담대)이라는 형식으로 받았다. 외담대란 물품을 납품받은 기업(원청업체)이 '조만간 우리가 지급할 대금이 있다'는 일종의 보증서를 하청업체에 발급하면, 하청업체가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현금을 미리 받아 쓰는 금융상품이다. 원청업체가 만기일에 하청업체에 주어야 할 물품 대금을 대신 은행에 지불하면 거래는 마무리된다. 은행은 이 과정에서 하청업체로부터 대출이자 형식으로 일종의 수수료를 받는다.

연 9% 수준 이자를 미리 내고 외담대를 받아 쓴 김씨는 지난 7월 B은행으로부터 갑자기 "돈을 갚아라"는 통보를 받았다. 김씨가 "무슨 돈을 말하는 것이냐"며 의아해하자 은행 담당자는 "원래는 에스콰이아가 돈을 상환해야 하지만 에스콰이아가 법정관리에 들어가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한다. 원청업체가 돈을 안 갚으면 하청업체가 이를 대신 갚아야 하는 게 외담대인데, 모르셨느냐"고 설명했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핸드백 부품비 등으로 이미 받은 돈을 다 써버린 김씨는 결국 은행에 돈을 갚지 못했다.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그는 법인카드가 정지되고 다른 은행의 금융거래가 모두 봉쇄돼 사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김씨가 갚지 못한 돈엔 지금도 연 15% 수준의 연체 이자가 계속 붙고 있다. 김씨는 "에스콰이아는 연초부터 계속 위험하다는 얘기가 돌았던 회사다. 그런 조항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위험한 금융상품을 썼을 리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디폴트(채무 상환 불능) 위험을 중소 하청업체에만 몰아버리는 '외담대' 때문에 피해를 보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대부분의 하청업체가 이런 규정을 담은 '상환청구권'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원청업체 부도 위험, 하청업체에 전가"

외담대는 인터넷뱅킹을 통해 거래가 가능할 정도로 간편한 데다 기업 간 현금거래가 용이한 결제 수단이어서 그 규모가 계속 늘고 있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2011년 303조원 규모였던 외담대는 2013년 348조원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많은 중소기업이 외담대 거래를 트면서 '원청업체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그 돈을 대신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상환청구권'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스콰이아의 외담대 거래로 현재 3개 은행에 5억6800만원을 갚아야 할 상황이라는 가죽업체 C사 사장은 "외담대 거래를 틀 때 깨알 같은 글씨의 약관을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 조항이 있는 줄 알았다면 차라리 어음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담대의 이런 특성을 악용해 경영이 어려워진 기업이 돈을 갚지 않을 목적으로 외담대를 실행하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어음을 막지 못하면 회사가 부도가 나지만, 외담대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원청업체에 가해지는 제재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은행은 원청업체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상환청구권을 들어 하청업체에서 돈을 받아내면 된다. 돈이 나가는 시점에 하청업체에서 적지 않은 이자를 챙긴 은행이 디폴트에 대한 위험 부담까지 하청업체에 지우는 셈이다. 에스콰이아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 어음은 계속 상환하면서도 외담대는 연체되도록 내버려뒀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던 올해 1분기에도 139억원의 외담대를 실행했다.

은행들은 부작용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은행의 여신 담당 임원은 "은행 입장에선 위험을 최대한 피할 수밖에 없다. 만약 상환청구권이 없다면 은행이 이런 상품을 취급할 이유가 없고 그 경우 결국 예전 같은 어음 체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 "대책 마련 중"

기업은행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1549개 하청업체가 원청업체가 갚지 않은 돈을 대신 갚았다.

금액은 784억원에 달한다. 현재 에스콰이아와의 외담대 거래로 은행에 돈을 대신 갚을 처지에 놓인 중소기업만 160개이고, 이들이 상환해야 할 금액은 289억원이다. 이 중 40개 기업은 현재 은행들을 상대로 채무부존재(채무 없음) 소송을 진행 중이다. 서울지방법원은 에스콰이아를 인수한 사모펀드 H&Q아시아퍼시픽코리아에 대해 하도급업체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중 H&Q의 재산 약 90억원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받아들여 이를 25일 집행했다. 이 소송을 진행 중인 법률사무소 ‘태우’의 도태우 변호사는 “H&Q가 돈을 갚지 못할 줄 알면서도 외담대를 실행했다는 점을 법원이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계속 불거지자 금융당국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외담대 사고 보상을 위한 보험을 활성화하고 상환청구권에 대한 고지 의무를 강화하는 등 외담대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신용보증기금이 ‘외담대 보험’을 판매하고 있지만, 위험도가 높은 기업만 주로 보험에 드는 역(逆)선택 탓에 손해율(거둔 보험료 대비 지급한 보험금 비율)이 900%까지 올라가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외담대(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 물건을 납품한 뒤, 하청업체가 그 매출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 형태로 물품 대금을 받아가는 상품이다. 어음 돌려막기로 인한 중소기업 도산 폐해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