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연구팀의 무인차 유레카 터보 모습

“무인자동차는 관련법이 없어서 일반 도로에서 운행하면 바로 불법이 됩니다. 학교 안에서만 시험주행 하려니 답답하네요. 구글은 벌써 무인차 누적 시험 주행이 100만km가 넘었다는데…”

카이스트(KAIST) 항공우주학공학과 심현철 교수팀의 무인자동차 ‘유레카’는 작년 5월 최고 시속 140㎞로 주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유레카는 카이스트 교문 밖을 나서지 못한다. 국내 법상 무인차는 도로를 주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 교수팀의 한 연구원은 지난 20일 “실제 도로 시험 주행을 해야 기술 격차를 줄일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며 “우리 아니라 무인차를 연구하는 다른 연구진들도 의미 있는 실험을 하려면 법을 어겨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지만, 각종 법규가 이를 뒤따르지 못해 산업 발전이 늦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주무부처가 손을 놓고 있는데다, 국내 업체 보호에만 힘쓴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기술 개발을 장려하고 산업을 육성할 일원화된 콘트롤 타워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아우디의 무인차 주행 실험 모습

◆ 기술 있어도 시험운행 못 하는 무인차

무인자동차 연구 개발은 최근 해외 유명 IT업체와 자동차 제작사들이 집중하는 주요 미래 사업이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미국 IT업체 구글이다. 구글은 2010년 첫 시험주행에 성공했고 올해 5월 운전대가 아예 없는 2세대 무인차를 선보였다. 2017년에는 상용화할 계획이다. 아우디, 메르세데스 벤츠, 프랑스 르노도 무인차 도로 시험 주행에 성공했다. 일부는 2016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하지만 국내 기술 개발 현황은 아직 미미한 상황이다. 특히 연구·개발을 하려고 해도 관련 규제에 가로막혀 기술 개발 속도가 더뎌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뒷짐을 지고 있는 가운데, 국회에서 제출된 법률안도 통과되질 못하고 있다.

지난달 국회 김희정 의원(새누리당)이 무인차가 국토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 한해 일반 도로에서 시험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했다. 이한구 의원(새누리당) 역시 현행 법령상 규제가 있더라도 전담 위원회 승인을 받은 신산업은 시범사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실제로 언제 시행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김문식 자동차부품연구원 차량무인화 기술연구팀장은 “법규가 없어 주행시험장에서만 시험운행이 가능한데, 실제 환경과는 천차만별”이라며 “정부가 판을 깔아줘야 기술력이 더욱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르노삼성 SM5 디젤 모습

◆ 같은 차체, 다른 분류 경직된 차급 규정…경차 활성화도 발목

수십 년째 바뀌지 않는 경직된 규정이 자동차 산업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대표적이다. 자동차관리법은 소형·중형·대형차를 배기량과 차체 크기 모두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한가지 기준만 적용하는 선진국에 비해 과도한 규제다. 차급 규제가 완화되면 각각의 장점을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결국 자동차 회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다.

한 예로 르노삼성의 SM5 디젤 모델은 기본적으로 중형차인 SM5를 기반으로 개발됐지만, 배기량이 1461㏄라 소형차로 분류된다. 같은 크기의 ‘SM5 TCE’(1618cc)나 ‘SM5 플래티넘’(1998cc)은 중형차다. SM5 디젤을 택시로 운행하면 소형 택시 요금을 받아야 한다. 연비가 기존 모델보다 우수해 택시 기사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소형 택시 요금으로는 현실적으로 운영이 불가능하다.

국내 경차 기준 역시 기술을 못 따라오는 대표적인 경직된 규정으로 분류된다. 국내 경차 기준은 배기량(1000cc 미만)과 크기 기준(길이 3.6m 이하, 너비 1.6m 이하, 높이 2m 이하)을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 르노가 생산하는 트윙고(배기량 999㏄, 898㏄)는 배기량 기준은 경차에 만족하지만, 폭이 국내 기준보다 4cm 더 커 소형차로 분류돼 수입되지 못하고 있다.

수입차 업계 한 관계자는 “국산차의 배기량과 크기에 꼭 맞춰야 하는 규제 때문에 경차 인정을 받기 어려워 들여오길 포기하는 모델이 종종 있다”면서 “수입차와 경쟁을 해야 국산차의 품질도 높아질 텐데 정부가 안방 사수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외국은 엔진이나 차체 크기 두 가지 중 하나로만 기준을 삼고 있다.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미국은 연방 정부가 실내 공간의 크기(차체 크기)를 기준으로 차급을 구분한다. 유럽은 배기량이나 크기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만족하면 된다. 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유럽은 분류가 애매할 경우 업체에 결정권을 줘 자율성을 넓혔다”고 말했다.

르노삼성 트윙고 모습

◆ 각종 최첨단 기술도 뒷북 합법화…“車 기술 융합시대 반영 못 하는 규제들”

경직된 국내 제도가 최첨단 기술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도 그동안 많았다. 까다로운 국내 주파수 규제가 대표적이다. 일부 수입차에 장착된 ‘운전자 사각지대에 경보시스템’은 인증받지 않은 주파수 전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여전히 불법으로 분류된다.

시대의 변화를 법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해외에서는 통용되는 기술이 국내에서는 국산 기술이 개발되고 난 뒤에야 합법화된 경우도 많다. 헤드업디스플레이(운전자가 운행 정보를 앞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장치)는 현대·기아차가 K9을 내놓는 2012년 4월에 합법화됐다. ‘주간주행등’도 2010년까지는 불법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규제가 첨단 기술을 장착한 수입차의 진입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해 국내 자동차 업체에게 단기적으로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 개발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또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법규와 규제를 정비할 콘트롤타워가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존 자동차 산업에선 부처 간 구분이 뚜렷해 갈등의 소지가 없었지만 기술 융합으로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부처의 업무가 충돌하는 상황이 나오고 있다”며 “자동차 산업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총괄적 콘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각종 법안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처리돼야 하는데 부동산 관련 내용이 주가 되고 교통쪽 내용은 부가적으로 고려되는 것도 한가지 이유”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