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스파한의 이맘광장에 가족들이 놀러 나왔다.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이다. 한 시인은 이곳 이스파한을 세상의 절반이라고 불렀다.

세련됨이란 무엇일까?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은 또 뭘까? 중동의 이슬람국가 이란을 여행하는 동안 내내 우리 부부를 따라다닌 질문이었다.

이란 북동부의 작은 도시 쟌잔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그 시작이었다. 우리는 조로아스터교의 옛 성지 탁테솔레이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잇몸이 다 보이게 웃는 운전사의 환한 첫 인상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는 요금을 낼 때가 되자 처음 약속과는 달리 우리에게 2만 토만을 더 요구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펴보였는데, 손가락 수가 둘이 아닌 셋이었다.

아마 자기 나름대로는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을 폈으니 2를 표시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엄지손가락이 어정쩡하게 펴져 있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3으로 보기 십상이었다. 정작 자신은 자기 손가락이 손님에게 어떻게 보일지 아랑곳없는 듯했다. 자기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것, 그게 세련된 것일까?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며 불을 섬기는 종교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옛 사원 탁테솔레이만은 분화구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다.

이어 이란의 슈스타에서 호텔을 잡았을 때의 일. 우리는 유적지인 ‘슈쉬’와 ‘쵸가잔빌’에 가볼 생각이었다. 슈쉬는 흔히 ‘수사’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수도이고, 쵸가잔빌은 그보다 더 오래된 신전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두 곳 모두 지금은 시골의 작은 도시로 전락해 버렸다.

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결혼피로연이 열렸다. 오후부터 호텔 식당에 무대가 꾸며지더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이란 대중음악이 엠프에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전까지 한 번도 이슬람 문화권의 결혼식을 본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에 부풀었다.

9시쯤 호텔 마당에 사람들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슬슬 그들 사이로 접근했다. 역시나 우리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누군가 초보적인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결혼 파티라며 오란다. “몇 시에 시작하나?” 물었더니 10시라고 했다. 시계바늘을 가리켜 확인까지 하고는, ‘그래 그럼, 그때 다시 올게’라고 하고 자리를 떴다.

실크로드의 한 정거장이었던 옛 마을을 찾아갔을 때, 우리의 안내원은 동네 꼬마들이었다. 아이들은 우리를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마을 속의 보물들을 보여주었다.

10시가 되기 조금 전. 늦을 새라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어째,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썰렁하다. “결혼 파티는 언제 시작하니?” “파티? 끝났는데.” “뭐? 10시에 시작한다며!”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이란은 결혼피로연도 남녀유별이었다. 성별로 서로 다른 방에서 잔치를 벌인다. 여성들의 방은 남성이 들어갈 수도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9시쯤 여자들 방에서 새나오는 음악소리는 진짜 파티 소리였다. 안에서 여자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노는 것 같았다. 그런 동안 남자들은 술도 없는 식사를 마치고 호텔 마당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이곳의 모든 결혼식이 그럴까 싶지만, 적어도 이날 피로연에서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영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10시에 시작한다”고 해놓고는 “10시에 끝났다”고 태연히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그 뒤에도 여러 번 겪었다. 단지 언어의 벽에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그것이 세련된 것일까?

기원전 13세기에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가 1950년대에 발견되었다. 이 쵸가잔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피라미드식 신전이다.

한번은 너무 목이 말라 동네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에게 “코카콜라가 있느냐”고 물었다. - 천하의 반미 국가 이란에도 코카콜라는 있었다. 아이폰 가게도 있다.- 주인은 “코카콜라는 없고 미란다가 있으니 그걸 마시라”고 했다. 나는 “아니 그건 됐고, 그럼 물 큰 거 한 병 주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냉장고 아래 칸을 열더니 물을 꺼내고는 코카콜라 큰 병이 있다고 했다. “아니, 됐다”고 사양한 후 가게를 나오면서 보니 냉장고 바깥 쪽에 펩시콜라가 보였다. 엥?

상황을 되짚어 보자. 내가 가게 주인이라면, 손님이 원하는 게 없다라도 그 비슷한 걸 먼저 권할 것이다. 코카콜라 작은 병이 없다면, 먼저 코카콜라 큰 병을, 그 다음 펩시콜라를 권하는 게 순서에 맞을 것이다. 이란 가게 주인의 납득하기 어려운 응대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있다. 이번엔 고속버스 매표소에서였다. 사안은 좀더 심각했다. 버스를 한 번 놓치면 그 다음 여행 일정이 완전히 엉망진창되기 때문이다. 슈스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큰 도시인 아흐바즈로 가야 했다. 거기에 쉬라즈행 고속버스가 있었다. 슈스타의 시외버스 터미널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난 후, 몇 시에 어디서 버스가 출발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싯 다운”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뭘 물어도 그랬다. 나는 애가 탔다. 결혼식장에서의 일이 자꾸 떠올랐다.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면 안 된다! 그런데도 웃으면서 “싯 다운”이라는 짧은 영어만 반복하는 직원 앞에 드디어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큰소리까지 튀어나왔다.

한번은 이란의 여자 축구팀 선수들과 버스를 같이 탔다. 여자는 축구 구경도 못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는데, 이란도 많이 변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기들이 싸온 점심 식사를 나누어주었다.

“호기심이 많고, 말이 많으며, 부정확하고 어린아이 같다.”

19세기말 조선에 와서 선교 활동을 벌이던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에 대한 평이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책에서 본 이 구절은 꼭 내가 이란에서 받은 느낌을 묘사한 것만 같다. 어쩌면 외부인이, 특히 문명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볼 때 갖는 공통의 선입견 같은 것은 아닐까? 다른 나라 사람들을 평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이란에서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