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산업부장

자동차 회사에서는 신차 디자인을 두고 종종 경영진과 카디자이너가 갈등을 빚곤 한다. 전문가인 디자이너가 제시하는 신차 디자인은 비전문가인 경영진의 눈에는 파격적으로 보이기 일쑤다. 디자인이 좋다고 칭찬하는 경영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튀는 차를 만들었다가 안팔리면 누가 책임을 지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디자인에 관여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경영자가 적지 않다.

과거 국내 자동차 회사에선 오너급 최고경영자가 디자인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초기에 구상했던 자동차가 엉뚱한 모습으로 바뀌는 일이 잦았다. 현대차가 1997년 출시한 800㏄급 경차 아토스가 대표적이다. 당시 최고경영자는 디자인팀의 반대를 무릅쓰고 차의 높이를 키울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차체는 작으면서 키만 껑충 큰 차가 탄생했다.

아토스

회사는 광고를 통해 유러피안 스타일이라고 선전했으나, 차를 본 상당수 소비자는 불안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차체에 비해 키가 커서 회전을 할 때 조금만 속도를 내도 쓰러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아토스는 이듬해 안정된 디자인의 대우차 마티즈가 나오자 경쟁에서 밀려 판매가 급격히 줄었다.

이런 ‘사고’가 빈발하자 자동차 디자인팀은 궁리 끝에 최고경영진의 지나친 간섭을 막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최고경영진이 신차 디자인을 최종 결재할 때 디자인팀이 심혈을 기울인 디자인 시안(A안)과 누가 봐도 부족한 시안(B안)을 올려 결재를 받는 방법이었다. 디자인팀이 희망하는 디자인을 최고경영진이 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이 방안은 효과를 거뒀고, 국산차의 디자인은 큰 실패 없이 꾸준히 향상됐다.

뉴그랜저 XG

하지만 이 방법도 완벽하진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진은 A안을 선택했지만, 때로는 B안을 뽑는 불상사도 벌어졌다. 2002년에 나온 뉴그랜저XG(그랜저XG의 후속모델)는 국내에만 팔리고 해외에는 수출되지 못했다. 해외시장 딜러들이 뉴그랜저XG의 뒷모습이 나쁘다며 수입을 거부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딜러들은 “뉴그랜저XG 후면에 장착된 빨간색 브레이크등(燈)이 지나치게 커 기형적인 모습”이라고 불만을 제기했다.

현대차는 800억원을 들여 개발한 뉴그랜저XG를 불과 1년여 만에 단종하고 추가 비용을 들여 후속모델을 개발해야 했다. 디자인 감각이 없는 최고경영진이 B안을 선택하는 바람에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 국산 자동차의 디자인은 크게 향상됐다. 해외에서 검증된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최고경영진의 부당한 간섭도 줄였다. 겉모습만 보고도 어떤 회사 차인지 짐작할 수 있는 패밀리룩 디자인도 개발했다.

아슬란

하지만 최근 몇몇 신차의 디자인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LF쏘나타는 디자인이 이전 모델보다 후퇴했다는 평가와 함께 판매가 예상치를 밑돌고 있다. 아슬란은 앞은 쏘나타, 옆은 그랜저, 뒤는 제네시스의 모습을 짜깁기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디자인 논란의 원인은 최고경영진의 디자인 간섭이 다시 커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물론 최고경영진이 디자인에 적극 관여한 자동차가 시장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반대로 디자이너가 야심차게 만든 차가 소비자에게 외면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디자인만 놓고 본다면 최고경영진보다 디자이너가 성공할 확률이 높다.

1990년대 중반 국내 TV·냉장고 시장은 뚜렷한 1위 기업이 없이 3개 업체가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앞으로 과장급 이상은 디자인에 절대 손대지 말라”고 지시한 후, 삼성전자는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고 한다. 디자인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자동차 회사 경영진이 참고해 볼만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