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원대 거부로 알려진 이상순 전 일산실업 명예회장은 한때 명동에서 ‘대부’로 통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이씨가 하루에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1000억원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때문에 대부와 함께 ‘현금왕’이라는 타이틀도 늘 이씨를 따라다녔다.

1971년 7월 국세청이 발표한 종합소득세 고액납세자 명단을 살펴보면 이씨는 6100만원을 납부해 당시 우리나라 납세자 중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씨보다 종합소득세를 조금 더 내 이씨 바로 앞에 랭크됐던 사람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 전 회장은 8600만원을 납부했다.

이씨는 화려한 혼맥(婚脈)으로도 유명하다. 정도원 현 삼표그룹 회장은 이씨의 둘째 사위다. 정 회장의 맏딸이자 이씨의 외손녀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과 결혼했다.

1970년대 대한민국 사채의 10% 이상이 이상순 소유

1972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8ㆍ3 긴급조치’를 것을 발표했다. 정부는 기업들이 사채 빚에 허덕이고 있다고 판단해 기업들이 쓰고 있는 사채 규모를 보고할 경우 건당 50만원이 넘는 채무에 한해 3년 거치 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이자율도 월 1.35% 수준으로 낮췄는데 이는 원래 이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긴급조치 시행에 맞춰 신고된 사채금액은 그 당시 통화량의 80%에 해당하는 3456억원이었다. 이때 자신이 기업에 빌려준 돈이 400억원이라고 신고한 인물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가 원풍산업 창업주였던 이상순씨였다. 전국 사채 신고분의 12% 가까이가 이씨 소유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 변두리 주택 가격이 350만원~400만원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400억원은 최대 1만1500채의 집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신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사업 수완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이씨는 여러 회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했다 되파는 현재의 인수ㆍ합병(M&A) 기법을 통해서도 돈을 잘 굴렸는데, 지금은 해체된 국제그룹이 사들였던 타이어 모방이나 현재의 두산그룹이 인수했던 천일곡산 등이 모두 이씨 소유의 기업이었다.

재계에서 이씨가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965년 수입상인 원풍산업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이씨는 원풍그룹 총수로서 활동하며 이때부터 만들어간 인연으로 후에 무역협회 이사ㆍ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ㆍ함경남도 중앙도민회 회장ㆍ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씨는 1979년 원풍산업의 지분을 국제상사에 넘기고 같은 해 일산실업을 설립한다. 이씨가 보유 기업을 줄여나가자 사람들은 ‘이씨가 다시 현금왕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씨의 지분 매각에 대해 ‘현금실력이 워낙 막강한 이씨가 기업을 매각하면서 돈을 더 확보하게 되자 재계의 숨은 돈줄이 되지 않을까 사채업자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사업할 때는 풍파…현금왕 복귀 후에는 조용히 지내

막대한 개인 현금을 가지고 ‘재계의 숨은 실세’라는 말까지 들었던 이상순씨였으나 사업가로서 활동활 때는 풍파가 끊이지 않았다. 사업가로서 이씨의 행적보다 현금부자로서의 이씨가 더 잘 알려진 것도 이씨가 여러가지 사건에 얽혀 좋은 사업가로서의 이미지를 쌓지는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970년 9월. 정부는 부동산을 대거 보유했으면서도 은행 대출금을 갚지 않는 20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씨도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당초 이씨는 소유부동산을 처분해 은행 대출금을 갚겠다는 각서를 작성하고서도,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대출 원리금을 상환할 생각을 하지 않아 정부로부터 강한 경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에는 인수 특혜 의혹도 불거졌다. 이씨의 회사였던 원풍산업은 1973년 부도 처리된 한국모방을 1974년에 사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재무부가 원풍산업을 밀어줬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1975년 1월 김용환 재무부장관은 자신이 직접 원풍산업에 26억원의 금융특혜를 줬다고 시인했다. 이에 대해 투자자들은 변칙금융이라고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1976년 이씨는 고려원양사장이었던 이학수씨(원양어업 붐을 타고 재벌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가 금융부정과 경영부실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의 탈세를 도왔다는 혐의가 불거지면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9년에는 주가조작설에 휘말렸다. 원풍산업 직원 한명이 회사의 중동 진출설을 퍼뜨리며 주가를 끌어올렸는데, 이 때문에 회사의 오너였던 이씨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조사결과 이씨는 주가조작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이씨는 일산장학회를 설립하고 대외활동은 줄여나간다. 이후 이씨의 행적은 장학회 활동을 제외하고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씨는 2011년 12월 별세했다. 당시 이씨의 직함은 일산실업 명예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