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이 '신속한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버리고 '선점자(first mover)' 전략으로 가는 것은 맹목적이고 위험한 선택입니다. 선점자와 신속한 추격자 사이의 중간으로서 '병행자(parallel mover) 전략'을 적절히 구사해야 합니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달 2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중국의 추격과 한국 제조업의 과제' 세미나에서 "한국은 빠른 추격자와 선점자 전략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맹목적인 선점자 전략은 위험하다는 조언이었다. 실제 여러 연구를 보면 선점자가 최종 승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아이팟의 원형은 한국이 개발한 MP3플레이어였고, 스카이프라는 인터넷 전화도 한국의 새롬이 개발한 다이얼패드가 최초였다. 소셜네트워크의 원조 역시 한국의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였다. 한국이 먼저 개발한 제품·서비스는 당시 글로벌 시장을 창출하지 못했거나 기술표준을 확립하지 못하는 바람에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성장 정체에 빠진 한국 기업의 성장 엔진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차가 시장을 주도할지 미궁에 빠져 있는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에서 현대차는 시장 대응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전기차₩하이브리드·수소연료전지차를 병행해 투자하고 있다. 사진은 현대차 마북환경기술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수소연료전지차를 개발하고 있는 모습

◇성장할 수 있는 新산업을 찾아라

그렇다면 한국 기업은 어떻게 미래 성장 사업을 찾아야 할까. 현재 우리 기업들은 중국 기업의 추격, 엔화 약세를 뒤에 업은 일본 기업의 부활, 글로벌 저성장 기조 지속 등 녹록지 않은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성장하기 위해선 신성장 후보에 대한 기술 연구 등을 꾸준히 벌일 수밖에 없다. 기술 개발과 소규모 생산을 벌이다 관련 시장이 커지는 것을 보고 빠르게 투자해서 과실을 얻는 수순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 디지털 TV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민관 컨소시엄은 1990년대 디지털 TV를 개발할 때 선진국들의 표준 논의가 4개로 진행되자 각기 다른 소그룹을 지정하여 병행적으로 개발을 벌였다. 그러다 표준이 결정되자마자 가장 빨리 이에 맞는 제품을 개발해 내는 선점자가 됐다.

현대자동차가 미래형 차 전략으로 전기차·하이브리드·수소연료전지차를 병행해서 투자하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차가 시장을 주도할지 미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고, 수소연료전지차도 중요한 대안 중 하나로 부상했다. 수소연료전지차 분야에선 작년 2월 세계 최초로 투싼ix 수소연료전지차 양산을 시작하면서 현대차가 주도권을 쥔 상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향후 어떤 방향이든 재빨리 대응할 수 있도록 각 분야에서 기술력을 축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과 LG는 전기차용 2차 전지 시장에서 추격자에서 선점자로 굳히는 중이다. 전통적으로 중대형 2차 전지는 일본이 앞섰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자국 내 수요에만 신경 썼고, LG화학·삼성SDI 등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통해 최근 들어 세계 시장 1위가 됐다.

이런 식으로 시장 선점 기회를 노리는 사례는 많다. 삼성그룹의 경우 2차 전지 외에 바이오·의료장비 등을 신성장 투자 목록에 올려놓았다. 최근 들어선 삼성전자가 스마트홈 분야를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새로 선정했다. 삼성스마트홈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오븐, 로봇청소기 등 생활가전 제품과 조명을 비롯한 생활 제품을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 스마트TV 등으로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홈 솔루션 서비스다. SK그룹은 계열사별로 신성장 동력을 준비 중이다. SK케미칼의 친환경 수퍼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인 '폴리페닐렌술파이드(PPS)', SK네트웍스의 렌터카, SK이노베이션의 유전 개발, SK E&S의 셰일가스 개발 등이 대표적이다.

◇연구개발 경쟁도 불붙어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LG가 이달 23일 서울 마곡에 차세대 미래 성장 동력인 융복합 관련 연구를 위한 LG사이언스파크 기공식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중장기 융복합 관련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다. 기존 LG 계열사 연구소가 단기적인 신상품 개발에 주력한다면 이곳에서는 그룹의 미래 사업을 연구하는 체제다. 전경련이 조사한 국내 600대 기업 연구개발비 추이를 보면 2012년 23조4000억원에서 꾸준히 증가해 올해 29조9000억원으로 급격히 늘고 있다. 국내 기업의 설비투자가 정체 상태에 놓인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글로벌 저성장 시대에 기존과 다른 제품을 내놓으려면 연구개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며 "연구개발에 얼마나 투자하는지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