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 경제부장

(장면1) “열 곳 투자해서 두세 곳 성공하면 이익나는 구조인 모험자본(벤처캐피탈)이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청와대 어젠다니 상업은행들이 창업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금융을 다들 열심히 해주세요. 그런데 안하시면 재미없습니다. 매월 실적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장면2)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못준다니까요. 그 당시 누가 자살보험금 약관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못줍니다’. 이미 ‘못주겠다’는 소송도 걸었어요.”

2014년 10월 28일 현재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민낯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가지 사례다. 약간 희화화한 장면들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명확하다. 한켠에서는 금융회사의 생명줄인 건전성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시장의 논리에 반하는 찍어누르기식 관치가 횡행하고 있다. 또다른 한켠에서는 고객과 약속은 안중에도 없는 후안무치한 금융회사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경제의 혈맥’이라고 하는 금융산업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구구한 설명 대신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금융산업의 맏형격인 은행의 평균 ROA(총자산순이익률·Return On Assets)는 2013년 고작 0.21%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인 ROA는 총자산으로 순이익을 나눈 값으로 자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2013년 수치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의 0.39%에도 못미치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었다.

최근 10년 사이 최대 수준이었던 2005년 1.27%, 2006년 1.11%, 2007년 1.10%과 비교하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자산이 100조원인 은행이라면 연간 순이익이 2005년 1조2700억원에서 8년이 지난 2013년에는 21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는 얘기다. 현재 글로벌 50대 은행의 평균 ROA는 0.9%~1.0%에 달한다. 또다른 주요 지표인 ROE(자기자본이익률·Return On Equity)와 NIM(순이자마진·Net Interest Margine)의 처지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모두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물론 저금리 기조 장기화로 금융산업의 수익성이 나빠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금융은 돈의 흐름을 쫓아가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속상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수료와 각종 금리 등 시장가격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반시장적인 관치금융이 금융산업을 멍들게 하고 있다. 금융의 공공성은 일정부분 필요하다는데 동감하지만 금융당국이 앞장서 금융산업을 획일화해선 결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최근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기술금융을 봐도 그렇다. 담보는 없지만 기술력이 뛰어난 창업초기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대한 과감한 금융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백번 천번 맞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가 주창하는 창조경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혁신기업들이 탄생하고 성장해 지금의 재벌 위주 산업 생태계를 강소기업들이 넓게 포진한 형태로 탈바꿈할 수 있어야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중인 기술금융은 영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국민들로부터 예금을 받아 단기 대출을 통해 이익을 내는 보수적인 상업은행에게 성공율이 낮아 위험도가 큰 곳에 돈을 대는 모험자본의 역할을 맡기는 것은 결과가 뻔하다.

상업은행들이 기술금융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담보대출에 치중된 은행의 자금중개영역을 각종 신용대출로 다양화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상업은행의 수익모델은 모험자본 처럼 투자한 벤처기업 한 두 곳이 대박을 터뜨리면 그동안의 손실을 만회하고 남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용등급이 높으면 이자를 덜 받고, 그 반대면 이자를 더 받는 시장논리에 따라 예대마진을 챙겨 ‘티끌모아 태산’식으로 수익을 내는 곳이 상업은행이다. 상업은행에 대한 금융당국의 기술금융 강요는 앞으로 몇 년 뒤에 상당한 부실 등 후유증을 낳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혁신기업에 대한 지원은 벤처캐피탈 등 모험자본에 대한 규제를 대대적으로 풀어 이들을 활성화시키는 게 지름길이다. 그래야 정권이 바뀌어도 혁신기업에 대한 지원 생태계에 지속성이 생긴다. 지금처럼 기술금융을 은행에 의존하다 보면 이명박 정부 때 녹색금융이 반짝하고 시든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영민한 금융당국이 이를 모를리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시중은행의 보신주의를 질타하자 은행권 죄기에 급급한 금융당국의 모습에선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비전과 철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 그뿐이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금융회사를 전리품으로 여기며 정치권이나 금융당국이 꽂아대는 낙하산은 금융산업을 망치는 또다른 주범이다. 매 정권 마다 낙하산 입성에 ‘줄서기 문화’가 팽배했던 KB금융이 리딩뱅크에서 어느순간 사고뭉치 은행으로 전락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금융회사들의 수준도 여기서 오십보 백보다. 여전히 제잇속을 챙기느라 소비자와의 신뢰를 저버리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최근 생보사들이 약관대로는 자살보험금을 주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번 미지급 자살보험금 논란은 생보사들이 보험 가입 2년이 지나 자살하면 일반 사망보험금보다 배(倍)이상 많은 재해사망보험금을 주겠다는 약관을 지키지 않아 불거졌다. 자살보험금이 사회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금융상품의 약관은 고객과의 약속이다. 약관 자체가 문제라면 그런 약관을 만든 생보사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약관을 최종 승인한 금감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얼마전 만난 금융권 고위 관계자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금융산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있는 것 같습니까?”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