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부장인 윤모(46)씨는 서울 동작구에서 3억5000만원짜리 아파트(109㎡)에 전세로 산다. 5년 전 입주할 때 전세금은 2억6000만원이었는데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전세금을 4000만~5000만원씩 올려줘서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집을 살 계획이 없다. "1억~2억원씩 은행 대출 끼고 집 샀다가 집값 떨어지면 어쩝니까. 전세는 손해날 걱정도 없는 것 아닙니까."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모(60) 사장은 지난해 가정용 금고(金庫)를 구입했다. "은행에 돈을 맡겨 봐야 이자를 쥐꼬리만큼 주고, 세금 폭탄만 맞는 것 아니냐"는 게 박씨의 변이다. 박씨는 은행에서 현금 2억원을 분할 인출해 골드바로 바꾼 다음 금고에 넣어뒀다. 박씨는 "한 10년간은 없는 돈이라 생각하고 살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1~2년 사이 가계의 자금이 소비와 투자로 시중에 다시 풀리지 않는 바람에 내수가 위축되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택시장으로 흘러들어야 할 자금이 전세시장에 몰려들어 주택경기는 침체되고 전세금만 치솟고 있다. 일부 거액 자산가들은 아예 자금을 금고에 넣어 두고 있다.

여기에다 빚에 눌린 가계들은 소득을 소비보다 빚을 갚는 데 우선 지출하고 있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 가구가 벌어들인 수입에서 각종 소비를 하고 남은 돈의 비율(흑자율)이 26.6%를 기록해 2003년(22.2%) 조사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만큼 가계 소비가 부진했다는 의미다.

◇중산층은 집값 하락, 세금 걱정에 지갑 닫아

경기도 분당에 사는 정모(55)씨는 2005년 12억원에 아파트(134㎡)를 샀지만, 현재 시세는 8억2000만원까지 떨어졌다. 주택 구입 당시 대출을 4억원가량 받았는데, 아직도 5000만원 정도 대출이 남아 있다. 정씨는 "거의 10년 동안 월급 받아 몽땅 은행에 다 갖다주고 맘 편하게 돈 한 번 써 본 적 없다"며 "빚을 다 갚아가니 정년도 다가오고 있다"고 푸념했다.

정씨 사례에서 보듯 고소득층과 중산층의 소비와 투자가 줄어든 데에는 '집값'도 큰 이유다. 2009년 이후 5년간 물가는 22.7% 올랐지만,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3.8%만 올랐다. 실제 집값은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경제연구원 한상환 경제연구본부장은 "전 재산의 70%가량을 차지하는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고소득층의 소비심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고소득층의 경우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금 부담까지 커졌다. 올해부터 한 해 은행 이자 등 각종 금융소득이 2000만원이 넘으면 최고 세율(41.8%)로 과세를 하는데, 그 결과 자산가들의 자금이 지하로 숨어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발행된 5만원권은 4조9410억원에 달했지만 환수율은 19.9%(9820억원)에 불과했다. 2009년 6월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됐을 당시를 제외하면 환수율이 가장 낮았다. 게다가 지난해 백화점·대형마트의 30만원·50만원권 상품권은 478만장이나 유통됐는데, 1년 전(227만장)보다 110%나 증가했다. 금융 당국은 시중의 일부 자금이 '지하경제'로 흘러들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민층은 '월세 쇼크'에 휘청

저소득층은 월세 전환이 늘어나면서 주거비가 급등하는 바람에 소비할 수 있는 돈(가처분 소득) 자체가 줄어들었다.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으면서 고소득층이 주거 형태를 대거 전세로 바꿨는데, 국토교통부의 조사에 따르면 2006년과 2012년 사이 고소득층 전세 비율이 6.2%나 늘었다. 전세 시장에 밀려난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월세주택에 거주하는 비율이 각각 5.1%와 9.7% 늘었다.

문제는 보증부 월세로 옮기는 순간 주거비가 급등한다는 점이다. 3억5000만원짜리 전셋집에 대출 없이 살면 월 주거비용이 55만원이지만, 같은 집에 보증금 2억5000만원을 내고 월세(전월세 전환율 6.2% 적용)를 내고 살면 91만원으로 급증한다. 지난해 전세에서 보증부 월셋집으로 이사한 회사원 이모(41)씨는 "월세를 내는 것이 집주인에게 돈이 뺏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깝다"며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벗어날 때까지는 가족 외식·여행도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조만 교수는 "가계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 것은 주택가격 하락은 물론 고용률 하락, 노후 생활비 마련에 대한 부담감 등이 겹쳐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월세 가구에 대한 세제·금융 지원을 강화하고, 고용시장을 활성화해 가계의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