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달 중견기업 과장으로 근무하는 강씨(35)는 지금 살고 있는 가락동 아파트의 전세금을 2억4000만원에서 3억3000만원으로 9000만원 올려주고 재계약했다. 근처 경기도로 이사를 갈까도 생각했지만 취학 전인 두 딸을 돌봐주는 처가와 멀어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모아놓은 돈 3000만원에 6000만원 전세대출을 받았다. 지금도 살림이 팍팍한데 이달부터는 전세대출 이자를 매달 20만원씩 더 내야 한다. 결국 강씨는 올해 큰 맘 먹고 바꾸려 했던 10년 된 중고차를 조금 더 타기로 했다.

#2. 합성섬유 원료인 PTA(고순도 테레프탈산)를 생산하는 SK유화는 지난 7월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3~4년 전만 해도 SK유화는 PTA 생산량의 대부분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중국이 자체 생산량을 늘리면서 2011년만해도 70%를 밑돌던 PTA 자급률이 올해는 100%를 넘을 정도가 됐다. 여기에 중국의 경기둔화까지 겹치면서 사실상 중국으로의 수출이 막힌 것이다. 삼성종합화학·롯데케미칼·SK유화·효성 등은 PTA 한 품목으로 2011년 37억달러(약 4조원) 어치를 중국에 수출했지만 올해는 8억달러도 채우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다.

가계는 빚 부담에 지갑 열기를 꺼린다. 유로존이 디플레이션 악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중국 경기가 둔화되는 '차이나 리스크'까지 현실화되면서 수출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간소비와 수출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의 투자 의욕은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 마저 재정 여력이 녹록치 않다. 세월호 사고 이후 경기 하강을 막기 위해 재정을 조기 집행한데다 경기 침체에 따른 세수 부족으로 인해 4분기 지출 여력이 예년 보다 크게 떨어진 상태다.

가계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 3인방 모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올 3분기 경제성장률은 세월호 사고 이전인 1분기 수준(전분기 대비 0.9% 내외)을 회복할 것이란 전망이 높지만 4분기에 다시 주춤해질 것이란 우려가 높아지는 배경이다. 게다가 유로존과 중국 이외에도 미국의 조기 금리 인상 가능성, 엔저 지속 등 대외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중국 등으로 수출되기 위해 인천항에서 대기중인 컨테이너 박스들


◆ 소비 짓누르는 가계부채수출 '차이나 리스크' 현실화

세월호 사고로 급전직하했던 소비 심리는 다소 회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좋지 않다. 소비자 심리지표 중 향후경기전망 동향지수(CSI)는 지난달 97로 100보다 떨어졌다. 기준선인 100을 밑돌았다는 것은 향후 경기가 좋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다.

이미 10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는 소비를 옥죄는 최대 요인이다. 더군다나 정부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와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 이후 가계부채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8월 규제 완화 이후 두 달 동안 가계대출이 11조원 늘었다고 밝혔다. 올 2분기말(6월말) 1040조원에 이른 가계부채는 내년 상반기에 1100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우려섞인 전망도 나온다.

소득이 빚보다 더 많이 늘면 문제는 없지만 경기침체가 장기화된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국제 비교해 보면 2012년말 163.8%로, 일본(128.8%), 미국(114.9%), 독일(93.2%) 등 주요국 대비 상대적으로 높다"며 "부채로 인한 원리금 부담이 증가하면 소득이 늘더라도 소비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채를 갚는 데 쓰여 소비부진이 더욱 길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기업 역시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경제 버팀목인 수출은 달러 기준으로는 지난 1~9월까지 2.9% 늘었지만 원화기준으로 3% 감소했다. 원화기준 수출 감소폭은 전년 같은 기간(1.7%)의 두 배 가까이로 확대됐다. 우리나라 수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의 경기가 부진한데다 부품 및 소재 자급자족이 늘어나 우리의 대중국 중간재 수출이 타격을 받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중국의 3분기 경제성장률은 7.3%(전년 동분기 대비)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분기(6.6%) 이후 5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지난 8월 74%로 2009년 5월(73.4%)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평균가동률이 상승하면 설비투자 압력이 높아지며 투자 증가로 이어지지만 지금은 낮은 수준에서 횡보를 지속, 투자 여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향후 설비투자 흐름을 보여주는 국내 기계수주도 민간부분의 경우에는 지난 8월 전년대비 2.9% 증가에 그쳤고 전월 대비로는 18.3% 감소했다.

◆ 상반기 예산 미리 당겨쓴데다 세수도 크게 부족

정부는 올초만 해도 경기가 연중 고른 성장을 보일 것이라고 보고 상반기 예산집행률 목표를 55%로 잡았다. 지난해 상반기엔 경기가 '상저하고'를 보일 것을 예상하고 집행률을 60.3%까지 끌어올렸지만 올해는 평년 수준으로 집행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4월 세월호 사고 이후 경기 부진을 우려, 재정 조기집행을 강화했다. 올 상반기 재정집행률은 58.1%까지 높아졌다. 하반기 쓸 돈을 상반기에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이 끌어다 썼다는 얘기다. 1~9월까지로 보면 재정집행률은 76%로 지난해 같은 기간(75.7%)보다도 소폭 높다. 이와 관련해 강석훈 의원은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재정을 조기 집행해 성장률이 예상보다 높아졌던 때는 지난 10년 중 3개 연도에 불과하고 조기집행은 하반기 경기 위축을 불러올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으로 세수 부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올 1~8월까지 국세수입은 136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00억원 줄었다. 올들어 국세 수입이 전년동기대비 감소한 것은 처음이다. 같은 기간 세수 진도율(연간 목표 세수 대비 징수실적)도 63.1%로 전년동기(65%)보다 1.9%포인트 떨어졌다. 이에 따라 세수 결손액이 사상 두 번째인 지난해(8조5000억원)를 능가하며 역대 최대인 10조원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기가 안 좋아 돈을 미리 많이 써서 남은 돈이 별로 없는데 들어와야 할 돈은 예상보다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세수가 부족하면 결국 연말에 예산을 계획대로 쓰지 않는 '불용(不用)'을 통해 쓸 돈을 줄여야 하는데 이는 재정의 경기 대응 능력을 약화시킨다. 지난해 불용 규모는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한 불용과 통상 발생하는 불용(5조~6조원)을 합쳐 14조2000억원이었다. 불용 확대는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0.9%(전분기 대비)로 3분기 1.1%에서 둔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올해 세수 부족분이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용액이 지난해보다 더 확대되면서 4분기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주요인이 될 수 있다.

국책연구원 소속 재정전문가는 "정부가 지출을 확대하면 민간 부문의 경제 활동이 촉진되는 승수 효과가 생기는데 반대로 지출을 줄이게 되면 경기 하방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급해진 정부…"돈 없어도 경기 위해 사업비 불용은 최소화"

정부도 연말 성장 둔화를 우려한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외신과 인터뷰에서 "경제활성화 대책으로 3분기 회복이 이뤄져 분기별 1%에 해당하는 성장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6일 국정감사에서는 "3분기 성장률은 1분기 정도(0.9% 수준)의 성장 속도를 낼 것"이라며 눈높이를 다소 낮췄다. 또 17일 국정감사에서는 "올해 성장률 전망은 3.7%지만 하방리스크가 있다"며 전망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앞서 지난 8일 정부가 연내 재정·금융을 통해 5조원을 추가 투입하는 내용의 경제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것도 4분기 경기 하강을 막기 위한 조치다. 세수 부족과 대외 불확실성에 맞서 성장률을 0.1~0.2%포인트라도 끌어 올리려는 목적에서 긴급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세수 부족으로 재정 투입이 큰 규모로 줄어든다면 이 같은 대책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기재부 관계자는 "재정지출 축소가 경기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기금 등을 통해 사업비 불용 규모를 최소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