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솔루션 업체의 김성모(가명·55) 사장은 지속적인 투자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요즘 그는 돈을 틀어쥐고만 있다. 보유 현금만 500억원을 넘는데, 이 중 90%를 은행 예·적금으로 맡겼다. 김 사장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투자하는데 그런 투자처가 없다"며 "투자할 곳이 없으니 돈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주변엔 사업을 아예 접고 공장을 팔아 현금으로 바꿔놓겠다는 사장도 있다고 한다. 돈이 안 돌면서 경제 현장에선 각종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정책자금 대출, 은행으로 직행

한 시중은행의 부행장은 요즘 기업들이 뭉칫돈으로 맡기는 거액 예금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다.

특히 은행으로 들어온 예금 가운데는 중소기업이 정부에서 대출받은 정책자금이 끼어 있다. 정부에서 투자하라고 준 연 1%대 낮은 금리의 대출을 받아서, 연 2%대 이자를 주는 기업 예금에 가입한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 근무했던 신한은행의 한 전직 임원은 "거품이 서서히 꺼지면서 사업을 접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면서 대출 대신 예금만 몰려들어 크게 고생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기업들이 본업을 제쳐두고 현금 모으기에만 혈안이 된 것은 장기 불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기업들은 갈수록 낮아지는 수익률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평균 ROA(총자산순이익률·순이익을 총자산으로 나눠준 것)는 2012년 2.39%에서 지난해 1.8%로 크게 떨어졌다. 반면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의 몇 배를 낼 수 있는지를 나타냄)은 2.6배에서 2.8배로 높아졌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이익이 줄었는데 이자보상배율이 올라간 것은 시장 금리가 하락한 탓도 있지만, 기존 대출을 갚아 이자 부담을 줄인 기업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여윳돈이 생기면 빌린 돈을 갚거나 잔고에 쌓아두는 성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요구불예금 2배로 증가

100억대 자산가인 이승민(가명·62)씨는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아 최근 주식형 펀드를 깨서 현금으로 바꾼 뒤 금고에 넣어뒀다"며 "나머지는 모두 은행 예적금에 맡겼다"고 말했다. 낮은 수익률로 고민하느니 집에 현금을 보관하면서 세금이라도 아끼겠다는 의도이다.

이처럼 소비와 투자를 하지 않고 남은 돈을 쌓아두는 것은 극단적인 안전 선호 성향 때문이다. 경기 침체로 투자 위험성이 커지면서 안전자산만 찾고 있다. 그러면서 시중은행의 요구불예금은 지난 8월 기준 114조9393억원으로 8년 전 63조7070억원의 2배에 육박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단기예금 같은 짧은 만기의 통화(M2) 증가율은 7.5%로, 만기 2년을 넘는 예적금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통화(Lf) 증가율 7.3%를 넘어섰다. 2010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이는 정부와 한국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투자되지 않고 월급통장 같은 곳에만 쌓이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러면 돈이 돌지 않아 경기 침체가 심화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안전자산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존 메이킨 수석이코노미스트는 "1990년대 초 일본은 Lf 증가율이 M2 증가율을 계속 밑돌았는데, 일본중앙은행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장기 불황의 징후를 발견했어야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일본에 대한 경고는 지금 한국에서 유효한 것이다.

장기 불황 부르는 돈의 함정

지난 2분기 민간 소비는 0.3% 감소했다. 1년 만의 감소세였다. 이런 상황에선 백약이 무효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연탄이 젖어 있거나 보일러가 고장나는 등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번개탄을 태워봤자 온돌방에 온기가 돌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자와 중산층이 돈을 돌려야 그보다 사정이 못한 서민에게도 온기가 전달되는데, 많은 서민들이 돌린 돈을 구경조차 못하고 있다.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돈이 돌지 않아 소비와 투자가 부진해지는 '머니 스파이럴(money spiral·돈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