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일본 도쿄 중심가에선 태워주기만 하면 내겠다는 뜻으로 1만엔짜리 현금을 흔들며 택시를 잡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돈이 돌지 않으면서 거품이 꺼졌고, 2년 후 1992년의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신문 사설엔 1년 동안 이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이란 단어가 5번이나 등장했다. 지금 한국 경제는 5가지 돈의 지표에서 1990년대 초반 일본과 그대로 닮아 있다.

첫째, 금리가 내려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준 금리는 현재 연 2%로 사상 최저이다. 우리 경제 수준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금리 수준인데도 소비와 투자가 부진하다. 1991년 일본의 국채 금리는 2%포인트 가까이 내려갔지만 소비와 투자는 감소했다.

둘째, 돈이 풀려도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 돈이 돌지 않아 1992년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7% 수준에 그쳤다.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3%였다.

셋째, 형편 좋은 대기업들이 투자 목적의 대출을 자제하자 대신 은행들이 중소기업과 가계 대출을 늘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 대출 가운데 자영업자 비중이 2008년 26.7%에서 올 6월 말 30.2%로 증가했다. 또 가계 부채는 2004년 500조원에서 지난해 1000조원으로 증가했다. 1991~1995년 일본에서도 대기업 대출이 줄고, 중소기업·가계 대출이 늘었다.

넷째, 대출 보증이 증가한다.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 은행마저 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면 형편이 안 좋은 하위 중소기업과 서민은 시중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되레 돈 구경하기 어려워진다. 이럴 때 정부가 보증을 늘린다. 1990년대 일본의 은행 대출 가운데 정부 보증이 들어간 대출의 비중이 6%에서 10%로 늘었다. 우리나라 신용보증기금은 올해 보증 규모를 작년보다 18.1% 늘려 운용하고 있다.

다섯째, 은행 예금이 증가한다. 가계 자산에서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은 1990년 50%에서 2000년 55%로 증가했다. 불안감에 현금을 확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우리나라 가계들의 예금 증가율은 10.3%로 2011년 1월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