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육성증언’을 15년만에 세상에 끄집어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기업인 김우중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업가는 아니었다는 게 신 교수의 평가다. “신흥국에서의 사업은 단순히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의 시장 거래가 아니라 정부, 정치인, 관료들을 상대해야 하고, 이들에게 경제발전의 정신과 수단을 함께 제공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 이미 수출 선도, 중화학산업 부실해결 등을 통해 경제발전과 산업발전을 함께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신흥국을 상대할 때에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 교수는 김 전 회장에게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압축된 ‘철학서(書)’다. 신장섭 교수와 김우중 전 회장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수출전사와 부실기업 해결 청부사 ▲2장 아프리카 공략, 국제 중재인, 그리고 ‘세계경영’ ▲3장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 ▲4장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다시보기 ▲5장 ‘세계경영’의 노하우와 리더십 ▲6장 기업발전과 상생, 그리고 국가발전 ▲7장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등으로 구성됐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과 김우중 회장의 남북 특사 활동 등이 처음으로 소개돼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지만, 이 책의 중심 테마는 ‘세계경영’이다. 제목을 통해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을 많다’고 외치는 이유다. 자본금 500만원짜리 섬유제품 무역상에서 출발해서 수출과 해외건설을 통해 개발도상국 출신 다국적기업 1위(해외자산 규모 기준)에 오른 과정을 반추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성실업을 통해 무역업과 인연을 맺고, 1969년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도중에 대우실업을 창업해서 불과 10년만에 한국 최대 수출기업으로 발돋움한 스토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대우의 세계경영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이지만, 김우중 전 회장의 도전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1976년부터 비(非)수교 국가인 수단에서 타이어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수단 정부와의 협상에 대해 “우리가 투자도 하고 당신네 제품을 마케팅 해서 해외에 제값받고 팔아주고, 국내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여오겠다고 했다”면서 “그래서 서로 합의해서 바로 영사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경제개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자세로 나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우중 전 회장은 수단에 진출하며 대통령 영빈관을 지어주며 수단산(産) 원면을 구입했다. 또 수단 최대 타이어공장을 지어주기도 했다. 수단 정부는 타이어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날(1980년5월29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영빈관 건설과 타이어공장 등을 건설하는 데 약 1억달러가

김우중과의 대화 책 표지

소요됐는데 대우가 20%, 현지사업가가 20%, 나머지는 한국수출입은행 대출과 상업차관으로 충당했다. 김 전 회장은 이에 대해 “수출입은행 자금 지원받고 현지에서 필요한 돈은 옛날 재일교포 재산을 한국에서 반입하던 형식으로 현지에 물건을 들여와 팔아서 만들었다. 공사해서 벌고 공사비 마련하기 위해 들여온 물건 팔아서 벌고, 양쪽으로 크게 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대우의 수단 시장 진출은 우리나라 정부와 수단의 수교로 이어졌다. 수단을 발판삼아 대우는 나이지리아. 알제리, 모리타니,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4개국에 진출했고, 대우의 진출은 이들 4개국과 우리 정부의 수교라는 결실을 맺었다.

‘성공신화’로 불리는 리비아 사업은 김우중식 세계 경영 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우중 전 회장은 리비아에서 건설사업을 하며 당시 국가수반이었던 무하마르 알 가다피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다피 국가수반은 당시 대우가 우조 비행장 건설 사업을 할 때 열흘 가까이 공사 현장에 머무르기도 했다. 가다피는 우조 비행장 건설 현장을 방문 한 뒤 “대우야 말로 리비아가 녹색혁명을 이룩하는 데 참된 우군”이라고 극찬했다. 이같는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대우는 리비아에서 1981년 이후 약 100억달러의 공사 수주를 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와는 리비아에 진출하고 한참 지나서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다”면서 “가리우니스 의과대학 공사에 입찰한 것이 첫번째 진출(1977년)이고, 우리가 우조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을 때 카다피가 현장을 방문했고(1980년), 미국에 제재를 받은 뒤(1982년)에는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고 떠올렸다. 그는 “가다피가 정권을 잡고 한 일이 학교 짓고, 도로 닦고, 집 짓고 그런 일이었는데, 우리는 그쪽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면서 같이 사업을 키운다는 생각을 했다. 돈을 벌어도 다 갖고 가지 말고 절반은 그쪽을 위해 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김우중식 세계경영은 국제분쟁의 중재자 역할도 했다. 리비아의 각종 대형 건설공사에 대우가 진출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리비아 간 중재에 나선 것이다. 1979년 리비아 시위대가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을 불태운 이후 1982년 미국 정부가 리비아산(産) 원유 금수조치를 내리자, 가다피 국가수반은 김 전 회장에게 만남을 청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가)나한테 ‘미국과 관계가 좋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아주 좋다’고 하니까 (미국과)‘금수조치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데 중간에서 연결시켜줄 수 있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의 요청을 받고 투자은행 라자드의 미국 은행장 등을 통해 미국 정부 고위층을 접촉했다. 김 전 회장의 중재를 통해 미국과 리비아의 특사들이 한국의 대우그룹 회장 사무실에서 만나기도 했다. 미국측은 김 전 회장을 통해 가다피 집을 폭격하기 전에 관련 정보를 전달해 가다피가 폭격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김 전 회장은 선진국 기업만 세계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진국 기업은 능력이 많고 후진국 기업은 능력이 적다. 그래서 세계적 경영은 선진국 기업이 하고 후진국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면서 “내가 일찍부터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 있는 회사들을 가봤는데 그렇게 능률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선진국 기업들은)일단 1년에 절반밖에 일하지 않는다”면서 “하루에 8시간 일하고 휴가도 길다. 정신적으로도 해이해져 있는 것 같고...”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그룹의 세계경영의 핵심을 ‘주인 의식과 책임감’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우리는 처음부터 중간 관리자나 대리급들을 믿고 그 사람들에게 많은 책임을 줬다”면서 “(주)대우에서는 대리에게 2000만달러까지 계약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줬다. 그러니까 본인들도 책임의식을 갖고 일이 빨리 처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남북 통일에 대해서도 ‘세계경영’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옛날부터 동북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룰장성)에 함께 진출해서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서 “북한을 직접 개방시키는 노력도 하고, 동북 3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방시키기도 하고. 동북3성에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서 북한 사람들을 많이 데려다 쓰면 북한이 개방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 3성 인구가 1억5000명인데, 남북한을 합치면 이 지역에 인구 4억명의 시장이 생긴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아침에 동북 3성에 출근하고 저녁때 퇴근하도록 하는 등 이 지역에 진출하게 되면 북한 정부가 폐쇄하려고 해도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김우중 회장과 YBM 프로그램 참여 학생들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고 있는 김 전 회장은 2012년부터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에 매진하고 있다. 1기에 이어 2기 수료생 전원이 베트남 현지 취업에 성공하면서 현지 기업의 반응이 뜨겁다. 지난해 시작된 3기부터는 정부의 해외취업 지원사업인 ‘K-Move’와 연계해 지원금도 받고 있다. 선발 규모도 크게 늘었다. 연봉 수준도 평균 3000만원 전후에서 4000만원 사이로, 베트남 현지에선 최고 수준이다. 4기부터는 파견 지역을 베트남뿐 아니라 미얀마로 확대한다. 김 전 회장은 젊은이들을 향한 조언을 구하자 이렇게 말했다. “신의를 지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정도되면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예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버는)시기가 빨리 오면 그 후 명예를 지키는 시간이 훨씬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