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대북 특사로 임명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고 밝혔다. 1993년 1차 북핵위기 때 김 전 주석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을 당시에도 김 전 회장이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대북 특사로 활동할 당시 김 전 회장은 당시 김일성 전 주석을 20여차례 만났으며,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했다고 회술했다. 그는 1991년 남북 정부 간 화해와 협력에 대한 첫번째 합의문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추진했을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강하게 반대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에서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와 같은 민간인이 북한과 먼저 접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나를 아예 특사로 임명해서 북한에 다닐 수 있도록 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총무처에서 관인 찍어 특사 임명장을 받고, 그걸 (북한에)제시하고 협상을 시작했다”면서 정부측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은 특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북한을 방문중인 김우중 대우그룹회장과 수행원등 일행 10명이 1992년 김일성을 만나 찍은 사진. 앞줄 한가운데의 김일성 왼쪽이 김우중 회장이다

그가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1980~1988년)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1988년~1993년), 김영삼 대통령(1993~1998년) 재임기 동안 북한을 다녔다고 밝혔다. 정부 공인 특사 역할을 한 것은 노태우 정부 때다. 그는 방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한 번은 유럽 정부의 안보담당 보좌관 하던 친구가 ‘북한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는데, 정부에 얘기했더니 다녀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정부 특사로 활동한 것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을 추진했을 때부터라고 소개했다. 그는 “남과 북이 다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2년 반 넘게 열심히 일했다”면서 “내가 그 바쁜 중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북한에 다녀왔다”고 회술했다. 그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추진했던 과정에 대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세 명이서만 스무 번 이상 만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반대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김 전 회장은 “김 위원장 측은 (남북대화에)반대했다. 김 주석은 하려고 했는데...”라면서 “합의서를 하는 데 문제가 생기니까 김 주석이 화가 나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시위를 벌인 모양”이라고 전했다. 김정일 전 위원장 측의 반대 의지를 꺾기 위해 김일성 전 주석이 칩거했고, 그 결과 김 전 위원장이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합의했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설명이다.

김우중과의 대화 책 표지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발판 삼아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됐었다는 비화(秘話)도 공개했다. 그는 “(당시)정상회담을 전제로 기본합의서를 추진했다. 성사되면 역사상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되는 거였다”고 떠올렸다. 그는 “(기본합의서가 체결된 뒤)노태우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하러 북한에 가시라고 권했다”면서 “그런데 결정이 계속 지연됐다.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노 대통령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지 못하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떠올렸다.

김 전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뛰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때는 특사 같은 직함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없지만,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게 있어서 YS가 정상회담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전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 사망 직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중재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된 과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내가 북한에 들어가 있을 때 카터가 왔다”면서 “그래서 김 주석에게도 카터와 잘 하셔야 한다고 얘기하고 나는 겉에 드러나지 않는 걸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나는 김 주석에게 빨리 정상회담을 하자고 설득했다”면서 “그래서 카터를 핑계 대서 정상회담을 하게 됐다. 나는 카터가 (북한을) 떠난 뒤 (남한에)돌아왔다”고 덧붙였다.

김 전 회장은 이같이 북한을 수시로 방문했음에도 자신의 행보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 때는 내가 북한에 그렇게 많이 다니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면서 “중국에 가면 거기서 이북 패스포트(passport·여권)받아 VIP 수속 하고,나올 때도 그걸로 수속해서 나왔으니까…”라고 소개했다.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일부

그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가까웠다”면서 “(한번은)와이프(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와 함께 갔는데, 김 주석이 와이프의 직선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을 더 좋아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다만, 그는 “그 때가 동구권이 무너지던 때였는데 김 주석을 만나보니 국내(남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데 해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면서 김 주석이 국제정세에는 어두웠다고 떠올렸다. 또 그는 “남한이 민주화 등으로 흔들리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남한상황이)된다고 하길래 ‘그런 것이 아니라 남한을 버드나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람이 불면 한쪽으로 가고 바람이 그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아 그러냐?’고 했다. 밑에서 (김일성에게) 보고야 굉장히 유리한 쪽으로 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 전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김 주석은 (남북관계를)어떻게든 잘하려고 했는데 김정일 위원장은 달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의 차이이기도 하고, 기본적인 철학도 달랐던 것 같다”면서 “거기 사람들은 김 위원장을 더 무서워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김 위원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다”면서 “그쪽 사람들 하는 얘기가 김 주석은 기분 좋으면 다 해준다고 하더라. 김 위원장측은 그게 무서운 거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의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우가 수출에 기여한 것 때문에 1969년부터 매년 산업훈장을 받았는데, 나를 좋게 보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 없이 훈장만 주는 데 나한테는 이것 저것 물어보시고...우리 부산공장도 방문하셨다. 그 후 고민이 생기면 일 년에 몇 번씩 청와대로 나를 불러서 얘기를 들으셨다. 비서관 없이 단독으로..”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일부

그는 또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셨다. 나를 ‘김 사장’이나 ‘김 회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중아’라고 부르셨다. 나도 박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면서도 “박 대통령께 내가 부탁한 것이 실질적으로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박정희 정부와의 유착설(說)에 대해서는 “우리가 (박 대통령)정부와 가까웠던 것은 맞는 얘기”라면서도 “그런데 그게 정부가 골치 아파하는 일들을 해줬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로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같은 언급은 1970년대 대우가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대우조선공사 옥포조선소(현 대우조선해양), 새한자동차(구 대우자동차, 현 GM대우) 등을 인수하며 중화학공업으로 진출한 것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내가 중화학산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서 “정부가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들이 합심해서 잘해야 된다”면서 “합심해서 노력하는 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