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DJ 정부 경제팀이 (삼성차를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내주는) 빅딜(사업 맞교환)을 강요하더니, 이것이 무산되자 법정관리 신청도 할 수 없게 막았다. 사재 출연을 포함해 13조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면 10조원을 지원해주고, 자동차를 포함한 8개 계열사를 경영하게 해줄 수 있다고 약속해놓고서는 담보로 다 내놓자마자 워크아웃으로 넘겨버렸다. 법정관리로 가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기는 등 진행한 구조조정은 결국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는 대우그룹 해체 과정과 그 폐해에 대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 전 회장은 특히 DJ 정부 경제팀과의 갈등 때문에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결국 대우그룹이 해체됐고, 그 결과는 한국경제에 매우 큰 손실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예만 봐도 정부가 나서 위기를 조장하며 우량 자산에 헐값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는 거의 공짜로 GM에 넘겼다는 것. 이 책의 3장과 4장에 걸쳐 기술된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 편에는 김 전 회장의 이런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김우중과의 대화 책 표지

◆ “IMF 위기는 금융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

김 전 회장은 먼저 IMF 위기가 기본적으로 금융이 잘못해서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와 IMF가 금융과 기업 공동 책임이라고 한 것과 다른 생각이다. 김 전 회장은 “기업이 망한다고 은행들이 다 망하면 제대로 된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외환보유액이 갑자기 줄어서 벌어진 일인데 이것은 정부가 금융기관을 도와주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금융기관에서 돈을 뺀 것도 외국인이지 기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또 IMF 사태 이후에도 1년 정도까지는 대우에 큰 자금 압박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만기가 돌아오는 것 중 일부 연장이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고 어떤 때는 (대출을) 늘려 받기도 했다는 것.

특히 정부가 당시 부채 비율 200%를 맞추라는 정책을 쓰는 등 악수를 둬 위기를 키웠다고 평가했다. 선진국과 우리 시스템이 다른데 부채 비율 수치만 놓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당시 관료들이 부채 비율 200%를 가장 먼저 맞춘 삼성이 좋아진 것을 근거로 “잘 된 기준이었다”고 자평하는 것에 대해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잘해서 좋아진 것이지 부채비율을 낮춰서 좋아진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살 때 선진국은 개인이 할부금융을 받지만 우리나라는 자동차 회사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서 할부 판매를 했어요. 개인이 져야 할 빚을 기업이 다 끌어안고 간 것이죠.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정부가 환율 관리를 잘못하고 그걸 기업 부실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큽니다.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 되니까 달러 부채가 하루아침에 두 배가 됐는데 기업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21일 밤 정부종합청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외화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 DJ와 IMF 위기 극복 함께 상의하는 사이였지만… 관료들과 사이 틀어져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한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권 초기 김 전 회장을 'DJ 경제 가정교사'로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전경련 회장이 됐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경제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면서 "전경련의 경우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을 전제로 회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DJ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신임을 받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은 인정했다. "DJ가 경제 관련 회의가 있으면 꼭 전경련 김 회장을 부르라고 해서 참석했습니다. 당시 '금 모으기 운동'도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죠." 김 전 회장은 "우리가 파는 일을 많이 해봤으니 국내에서 금을 모으기만 하면 파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DJ가 김 전 회장을 자주 찾은 것에 대해서는 "조심성이 많은 분이기 때문"으로 묘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사람 얘기만 듣지 않고 여러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 중에 보류되거나 기각된 정책도 있었다는 게 김 전 회장의 말이다. 관료들이 김 전 회장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김 전 회장은 "DJ가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얘기하라고 했고, 나도 젊을 때니까 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에 받아쳤다"고 했다. 하지만 '수출을 늘려 IMF를 벗어나자'고 생각한 김 전 회장과 달리 신흥 관료들은 'IMF 식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종종 격돌하는 관계가 됐다. 김 전 회장은 이런 갈등이 결국 GM의 투자를 받아 외자를 유치하려던 김 전 회장의 구상에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우리 대우를 좋지 않게 보던 정부 관계자들이 GM 사람들에게 안 좋은 얘기들을 해서 협상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어요. 유동성 규제를 할 때에도 대우만 겨냥한 조치를 내놓고, DJ에게 우리 부채 상황을 보고 할 때도 '밀어내기 수출이다', '외상매출이다' 하며 수출금융을 해주지 않은 잘못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웠지요. 나중에 삼성과 '빅딜'을 할 때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딜(거래)이 깨지도록 방해했어요."

◆ 처음엔 삼성과 빅딜 하라고 강요하더니…

김 전 회장은 삼성과의 빅딜 추진도 알려진 것과 달리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사업적으로 봤을 때 삼성자동차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김 전 회장은 "경제규모라고 생각하는 연산 250만대 투자를 다 진행하고 있었는데 삼성차의 20만대를 더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면서 "삼성이 당시는 자동차에 돈 많이 쓴데다 삼성전자도 별로 좋지 않아 우리를 찾아와서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7월 1일 청와대로 전경련 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을 초청, 면담을 갖기 앞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장 왼쪽이 김우중 회장

김 전 회장은 빅딜에 응한 이유도 "정부가 강하게 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유동성 문제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만났을 때도 이야기는 잘 됐지만, 정부가 덤벼서 스케줄을 만들고 방해해서 잘 안 됐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김 전 회장은 "'대우가 곧 망할 수 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한다'고 정부 사람들이 나서서 얘기하는데 어떻게 딜(거래)이 제대로 진행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빅딜을 막은 것도 정부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삼성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빅딜이 깨졌잖아요? 나는 그 사람들이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유도했던지 미리 양해했다고 봐요. 우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려고 했을 때에는 형사처벌하겠다고 우리 경영진들에게 온갖 협박을 다했어요. 만약 빅딜이 됐다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었을 거에요."

김 전 회장은 관료들이 스스로 얘기하던 '구조조정'과 반대 결과이기 때문에 빅딜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빅딜이 된 다음에 대우를 망하게 하면 처음부터 빅딜을 잘못 추진한 거라는 비난을 받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빅딜이 깨지는 것이 제일 좋았을 겁니다. 말로는 빅딜만 되면 해결해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거지요. (빅딜이 진행되는 동안)이헌재씨를 한두 번 만났는데 '대우를 어떻게 부도야 내겠습니까? '라고 말해요. 그러면 회사를 살리는 쪽으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헌재씨가 그런 것은 법정관리로 가는 것을 막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 지분 다 내놓게 하고 워크아웃, "뇌관을 제거했다"

삼성과의 빅딜이 무산되고 1999년 7월 김 전 회장은 사재 출연 1조3000억원을 포함해 13조원을 채권단에 맡기고 자동차 부문과 ㈜대우 등 8개 계열사 회생에만 전력하겠다는 '대우 유동성 개선을 위한 자구방안'을 내놨다. 김 전 회장은 이것이 정부가 금융 지원과 8개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서 낸 자구안이었지만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다.

대우전자 빅딜에 반대하는 근로자들의 명동 집회 모습


"정부가 처음 약속대로 10조원을 지원해줬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4조 원만 돈을 줘요. 그것도 1주일간 시간을 끌다가. 그러니까 시장에서 아무 인정을 못 받고 똑같은 형태로 (유동성 위기가)다시 시작됐어요."

그는 이것이 지분을 다 내놓게 한 뒤 관료들 마음대로 대우 계열사를 처리하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상적인 워크아웃에서는 기존 경영진을 인정해주고 경영진과 채권단이 협력해서 기업을 살리면 경영권을 돌려주지만, 관료들이 그렇게 하기 싫었다는 것. 특히 삼성은 법정관리를 허용하고 대우는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자구안이 나온 당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우중 회장이 말한 퇴진 시한과 관계없이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조만간 손을 뗄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 발표로 뇌관 제거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 이미 대우는 해체 수순으로 갔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시각이다.

"법정관리로 가면 법원에서 법절차에 따라 해결하니 자기들 마음대로 못 하게 되지요. 우리가 순진하게 사재도 출연하고 담보를 다 내놓으니까 워크아웃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예요. '뇌관을 제거했다'는 것이 채권시장 안정 핑계를 댔지만 결국 나를 대우그룹에서 제거했다는 얘기지요."

강봉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튿날 "구조조정이 끝나면 김 회장의 지분은 모두 없어진다"면서 "소유권을 포기한 것과 같다"고 했다.

강 전 장관이 "선택은 시장의 신뢰를 잃은 부실기업이 부도를 내고 파산하느냐 아니면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경영주를 퇴진시키고 채구무조를 재조정해서 채권금융단의 관리체제로 가느냐의 길 뿐이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사재와 담보를 내놓으면 10조원 자금을 지원해주고 8개 계열사를 경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지키지 않을 약속을 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면서 "워크아웃으로 몰아가려고 맘은 먹고, 거짓말로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사재와 담보를 받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다. 여러 경로로 해외에 나가 있으라는 얘기가 들어왔고 DJ에게 전화해서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이기호 경제수석과도 만나서 다짐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2005년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 대우차 헐값에 GM에… 한국 경제에 피해 입혀

김 전 회장은 이후 해체된 대우의 각 계열사가 대부분 정상화됐다는 점을 들어 당시 대우를 부실로 낙인 찍은 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우의 12개 계열사 장부상 자산가치 91조9000억원이 실사 결과 30조7000억원 줄어든 61조2000억원으로 나온 것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금융감독원 지시를 받은 회계법인이 기계 설비는 고철 값으로 계산하고 공장 건물은 아예 값을 안 치는 등 가치가 있는 자산까지 50% 또는 0%로 평가했다는 것.

대우 측 실무진들은 12억 달러(약 1조5000억원)짜리 파키스탄 건설공사를 100% 손실처리한 것, 리비아 원유수출대금 1조원을 100% 손실처리한 것, 1조원 들여 자동차 3종 개발한 것도 무형자산 인정하지 않은 것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김 전 회장은 특히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긴 것을 가장 큰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999년 1월 8일 대우차 빅딜에 반대하며 구미공장 이직원들이 차량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경제팀이 잘못 판단해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봅니다. 처음 워크아웃 할 때부터 대우차를 쓰레기 취급했으니까요. GM이 대뜸 우리와 협상하던 가격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값에 사겠다고 한국 정부에 편지를 보낸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기술 자립이 어려웠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에요. 그러면 GM이 왜 우리와 다시 합작을 하자고 제안합니까? GM은 우리가 독자 개발한 모델이 탐났으니까 합작하자고 한 거예요. 남들은 없는 것도 잘 포장해서 비싸게 팔려고 하는데 한국 정부는 그때 우리가 잘 가지고 있는 것도 쓰레기라고 대문짝만 하게 얘기해놓고는 이 물건 살 사람 없느냐고 찾아다니고 있었던 셈이지요."

김 전 회장은 GM이 대우를 거의 공짜로 인수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부실자산 다 빼고 우량 자산만 골라서 가질 수 있게 한데다, 1조원 이상을 투자한 신모델도 그냥 넘겨줬고, 대우중공업에 있던 티코 생산 라인도 대우차 팔 때 함께 줬다는 것 등이 이유다. 김 회장은 "GM이 현찰 4억불밖에 내지 않는데 산업은행이 20억불 자금 지원을 해줬다"면서 "정부가 우리를 워크아웃에 집어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청산 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대우차 자산 가치가 110억불(약 13조원)가량 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110억불의 돈을 날린 셈"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 구도를 봐도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의 2사 체제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독과점 체제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