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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전선회사들이 17년간이나 한국전력에 공급하는 전기계량기 가격을 담합해 납품한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뒤늦게 적발됐다. 이번 장기 담합은 공정위가 적발한 담합사건 중 최장기간에 해당한다.

◆ 20년 가까운 담합…어떻게 진행됐나

공정위는 국내 전선업체 14곳이 1993년부터 2010년까지 한전이 발주한 공개입찰에서 미리 물량을 나누고 입찰 가격을 합의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적발된 전선회사들은 한전의 공개입찰제를 교묘하게 담합에 활용했다. 한전은 이 기간 중 해마다 공급 희망수량과 함께 공급가격을 적어내도록 하고 이 가운데 최저가를 적어내는 업체를 낙찰했다. 이런 사실을 안 5개 회사는 2008년까지 물량을 미리 나누고, 분배 받은 물량을 낙찰 받을 수 있도록 입찰가격을 사전에 모의했다.

특히 이들 5개 회사에는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LS산전과 대한전선(001440)과 같은 대기업도 포함됐다. LS산전은 공정위가 14개 업체에 부과한 과징금 113억원 가운데 가장 많은 39억원을, 대한전선은 19억원을 물게 됐다. 담합에 가담한 이들 회사들은 심지어 서로의 배신을 막기 위해 서울 근교의 식당에 한데 모여 담합을 모의하기도 했다. 한전에 따르면, 이들 회사가 이런 식으로 올린 매출이 3300억원에 이른다.

이번에 적발된 일부 회사들은 공정위의 조사 결과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 업체 관계자는 “한전이 입찰에 참여하는 회사들에 제시하는 예비가격 자체가 너무 낮게 책정됐다”며 “가격 경쟁을 하기 힘들고 담합에 따른 가격 인상 효과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전 측은 공급업체들의 최종 낙찰가가 한전이 제시한 기초금액과 거의 같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금액은 한전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발주 제품의 시장 평균가격이다. 전선업체들이 담합으로 최저가 입찰제를 피해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전 관계자는 “이들 업체의 담합에 따른 피해금액은 현재로선 추산하기 어렵다” 고 말했다.

◆ 한전 “2009년에 낌새”…공정위, 알고도 3년 허비

공정위는 2012년 담합업체 직원의 신고를 받고 조사를 시작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 조사는 물증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는다”며 “심증만으로 조사에 뛰어들면 재심사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3년 앞선 2009년에 최초의 담합 신고가 있었다. 신고자는 발주사인 한전이었다.

한전 관계자는 “2009년 입찰을 진행하면서 이상한 점이 발견돼 공정위에 심증과 함께 정황을 담은 물증을 신고했다”고 말했다. 한전이 2009년 진행한 입찰은 유찰됐다. 유찰이 되면 발주 회사와 공급 회사가 1대1로 수의계약을 진행하게 된다. 한전은 수의계약을 위해 회사들을 초청했지만, 단 한 곳도 응한 곳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측이 이처럼 구체적 정황을 제시했는데도 공정위는 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정위는 이전에도 ‘늑장 대응’으로 끊임없이 구설에 올랐다.

건설사들의 ‘4대강’ 담합 의혹을 2년 8개월 가량 끌은데 이어 액정디스플레(LCD)이 국제 가격담합 사건을 처리 시효인 5년을 넘겼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가 길어진 것은 담합에 가담한 업체수가 많았기 때문이다”며 “관계자들을 조사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공정위 조사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발 빠른 대응을 놓치는 이유가 된다고 지적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번 담합 사건도 한명의 조사관이 거의 모든 과정을 담당했다”며 “동시에 여러 사건을 다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