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현 조선경제i 총괄이사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제조 회사인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기획서와 보고서 등 각종 자료를 만들 때 자체에서 개발한 '훈민정음'을 기본 워드프로세서로 사용한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회사인 구글도 자체 개발한 '독스(Docs)'를 회사 자료를 만들 때 기본 워드프로세서로 사용하고 있다.

둘의 차이점은 겉보기에 거의 없다. 하지만 임직원들이 매일 공기처럼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는 작은 습관의 차이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구글 임직원들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독스에서 바로 자료를 생성하고 동시에 함께 작업할 사람을 그 문서에 초대한다. 경우에 따라 래리 페이지 CEO도 해당 문서에 처음부터 초대하고, 세계 각지의 직원들이 온라인에 30명까지 동시에 접속해 함께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삼성전자는 모든 직원이 일단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 혼자서 작업한다. 그 후 이메일에 자료를 첨부하여 상사나 동료에게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으면 자료를 수정하여 이메일에 다시 붙이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변종(變種) 자료가 계속 발생하고 또 모든 일이 순차적이면서 계층적으로 진행된다.

두 회사의 워드프로세서 활용 습관은 지식 공유의 속도와 질에서 극심한 격차를 낳는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가 독스를 통해 말단 직원의 아이디어를 늘 빛의 속도로 접한다면,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은 밑바닥 아이디어를 중간 간부들이 훈민정음이나 MS워드로 종이에 인쇄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또 구글 임직원들은 부서 사이 칸막이를 넘어 수시로 연결되어 함께 일하고,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각자 칸막이 속에 갇혀서 늘 따로 일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최근 1~2년 사이에 약점인 SW 경쟁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운영체제(OS) 안드로이드의 주인인 구글이 시시콜콜하게 삼성전자에 간섭하면서 더 절실하게 탈(脫)하드웨어 전략에 회사의 사활을 걸고 있다.

시장은 삼성전자의 변신에 회의적이다. 인터넷 시대의 SW 개발은 소수 엘리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오픈 공간에서 수만명의 프로그래머 간 협업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와 '비밀주의'에 최적화된 삼성전자가 그런 느슨한 협업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조직에 오랫동안 밴 작은 습관부터 바꾸는 것에 착안하면 의외로 탈하드웨어 전략의 단초를 잡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이나 MS워드에 길들여진 임직원의 일상 습관부터 바꾸는 것이 그런 시도 중 하나다. 훈민정음의 본질은 보고용 자료를 종이에 보기 좋게 인쇄하는 데 초점을 맞춘 1인용 타자기다. 산업시대의 낡은 유산인 셈이다. 이에 비해 독스는 30명까지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 온라인 타자기이자 작업 결과물을 언제 어디서든지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도서관이다. 나아가 독스는 단순한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 집단 지성과 오픈 이노베이션 등 인터넷 시대의 가치를 담은 신(新)문명을 상징한다.

1인용 타자기로는 결코 세계적인 SW를 만들 수 없다. 삼성전자가 지금이라도 훈민정음을 혁신한다면 혹시 작은 불씨를 살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